[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1> 상하이
1845년부터 100년간 ‘모던 도시’ 상하이에 외국인의 천국 있었죠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영국의 야망
아편전쟁의 전리품, 번화가에 ‘난징루’ 이름 붙여
상하이는 아편전쟁으로 불리는 중영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전리품이었다. 이화양행(怡和洋行, Jardine Matheson Company), 보순양회(寶順洋行, Dent&Co.) 등 아편·차 무역을 담당하던 소수 영국 대형 상인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독점 특권상인인 중국 공행(公行)의 방해를 받지 않는 자유무역을 구가해 부를 쌓았다. 상하이 영국조계는 영국이 주권을 장악한 홍콩과 달리 청나라의 영토였다. 외국상인들은 선거로 7명을 뽑아 참사회(municipal council)를 구성해 자치를 실시했다. 초창기 참사회 구성은 영국인이 6명, 미국인은 한 명이었다. 이들은 징세권을 행사하며 항만이나 도로 건설 등 공공업무를 수행했다. 상하이는 철저한 상인들의 ‘자유 도시’였다. 조계의 행정조직은 청조의 6부 가운데 공부(工部)에서 이름을 따 공부국(工部局)으로 불렸다.
영국인들은 난징(南京)조약으로 상하이를 얻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 최대 번화가에 난징루(南京路)라는 이름을 붙였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20~30년대는 상하이의 최고 번성기였다. 영국의 대중(對中)투자 절반이 상하이에 집중됐다. 20세기 초 상하이 외국인 소유 토지의 90%가 영국인 차지였다. 그늘도 있었다. 1925년 공부국 경찰이 난징루에서 중국인 노동자에게 발포한 5·30사건이 터졌다. 중국인들의 반영(反英)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여기에 후발 진출국 일본의 군사적 야심이 팽배해졌다. 1941년12월8일 새벽 진주만공격을 단행한 일본은 동시에 영국에 선전포고했다. 황포강에 정박해 있던 영국 포함이 일본군의 집중포화로 격침됐다. 이로써 영국인들의 상하이 지배 100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미국의 정열
1910년대부터 동양의 뉴욕을 만들다
한편, 1910년대부터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를 모방한 은행건물들이 와이탄의 초창기 무역업체(商館) 건물들을 대체해 나갔다. 상하이에 금융업 주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상하이는 ‘동양의 뉴욕’, ‘동양의 월가’로 탈바꿈했다. 1930년대 상하이는 인구 300만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사회적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동시에 여가를 즐길 여력이 생긴 중산계급이 탄생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오락과 서비스 산업이 발달했다. 영국식 귀족문화 일색이던 상하이 나이트라이프에 미국풍의 쇼핑·음식·연예·영화가 밀려들었다. 이른바 ‘상하이 모던’으로 불리는 독특한 대중문화가 탄생했다. 4대 백화점이 난징루에 세워지고, 세련되고 교양있는 여성 점원들이 등장했다. 이들이 바로 모던 걸의 선구자였다.
1895년12월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바로 다음해 8월11일,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의 영화가 상영됐다. 세계 최첨단 문화의 전파에 시간차가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는 헐리우드 영화가 상하이 영화계를 장악했다. 미국 영화를 모방했다고 자백하는 범죄자들까지 속출했다. 한편, 상하이 일반 중국인들은 은막 속의 번영한 미국을 선망했다. 동시에 상하이의 밤은 미국 문화의 대명사인 재즈와 댄스홀이 불야성을 이뤘다. 대중문화와 함께 미국인들의 선교와 교육기관도 상하이에 밀려들어왔다. 1879년 세워진 세인트 존스대학(현 화동사범대)는 대표적인 선물이었다.
러시아의 비애
혁명 뒤 입국한 난민 1200명의 고달픈 삶
1922년12월5일 백러시아 출신 스타르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황포강에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파와의 전투에서 패한 제독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 30여척을 구입해 난민 1800명을 포함해 9000명과 함께 출발했다. 조선의 원산과 부산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일본이 거부했다. 악천후를 뚫고 상하이에 도착한 배는 14척, 1800명에 불과했다. 가난한 백인의 등장은 상하이 조계 사회에 충격이자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항만관리국은 고심끝에 1200명만 상륙을 허가했다. 나머지 난민과 스타르크 제독은 마닐라에 도착한 뒤 함선을 팔아 부하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자신은 파리로 건너가 운전수로 연명하다 비참하게 세상을 떴다. 1924년 영국과 중국이 소비에트를 승인하자 백러시아계 난민들의 비애는 더욱 깊어졌다. 치외법권의 혜택도 못받고, 영어와 중국어도 못하는 러시아인들은 5·30사건으로 악화된 상하이 노동시장에서 중국인을 대체했다. 여성의 22.5%는 매춘의 길로 빠져들었다. 반면에 성실한 러시아인들은 정착에 성공했다. 이들은 오페라·발레·클래식 음악 같은 유럽 살롱 문화의 전도사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인들은 다른 서양국가와 달리 상하이의 국제성을 유지하려는 일본군에게 중립국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패망뒤 공산 혁명이 상하이를 엄습했다. 혁명을 혐오해 조국을 떠났던 러시아인들은 제2의 고향 상하이를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상하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대인들의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다. 나찌의 박해를 피해 유대인들은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상하이 최후의 외국인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은 군사력을 앞세워 상하이 전역을 장악했다.
한편, 중국인들은 와이탄 북단의 퍼블릭 가든(현재 황푸공원) 앞에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는 수모를 의지로 이겨내고 상하이 탈환에 성공했다. 상하이 ‘해방’에 성공한 공산당은 30여 년간 농촌이 상하이를 지배하는 형식으로 사회주의 개조를 단행했다. 다국적 도시 상하이는 개혁·개방과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계기로 다시 용트림을 시작했다. 상하이 당서기를 역임했던 장쩌민이 푸둥의 마천루를 만들었다면 역시 상하이 당서기를 역임한 시진핑은 상하이에 과연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 를 기대해보자.
참고도서 에노모토 야스코(榎本泰子),『上海-多國籍都市の百年』, 2009; 上海市旅游局, 『2010體驗上海』, 201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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