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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122> 제헌절 맞아 본 판결문 변천사

ngo2002 2011. 2. 14. 12:45

[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22> 제헌절 맞아 본 판결문 변천사

5·16 후 사건 급증 … 신속한 처리 위해 가로쓰기 판결문 나왔죠

17일은 62번째 맞는 ‘제헌절’입니다. 헌법의 의미,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되새겨보는 날입니다. 우리가 헌법과 법률이 살아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건 형사든, 민사든 재판을 접하게 될 때입니다. 재판이 끝나면 그 결과가 판결문에 담기게 되는데요. 헌법이 발원지라면 그 물길의 끝에 판결문이 있는 셈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판결문이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판결문이 정치·사회·문화의 변화뿐 아니라 기술 발전까지 압축돼 있는 시대의 산물임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대법원 법원도서관에서 관련 자료와 사진을 제공받았습니다.

권석천 기자

가장 오래된 판결문은 ‘동학당’ 사건

1895년 5월 4일 고등재판소 판결선고서. 현재 남아 있는 판결문 중 가장 오래된 것 이다. <자료제공: 법원도서관>
현재 남아 있는 판결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언제쯤 나왔을까요. 답은 115년 전입니다. 1895년 5월 4일에 나온 ‘고등재판소 판결선고서’는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것이었는데요. 충청도 청풍읍의 평민 황거복 등이 동학당(東學黨)에 들어가 지방의 안녕을 해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고 돼 있습니다. “범죄가 입증되지 않아 무죄 방면(석방)한다”는 결론이 적혀 있습니다. 이 판결문을 보면 사건번호와 피고인의 주소, 성명이 있고요. 마지막 부분에 선고일자와 재판을 맡은 참의(현재의 국장급)와 주사의 이름이 적혀 있지요. 한지에 붓으로 판결문을 작성했는데, 대부분 한자에 토씨만 한글로 썼습니다. 두 번째로 오래된 형사 판결문은 동학당 판결이 나오고 18일 후인 5월 22일 한성재판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용은 ‘상인인 피고인이 술에 취해 순검(현재의 경찰관)을 상해한 사건에서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고 장형 60대에 처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일본어로 작성된 판결문

1895년 5월 22일 한성재판소 형사 제1호 선고서. 한성재판소가 설치되고 13일 후에 나온 것이다. <자료제공: 법원도서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판결문도 일본어로 채워졌습니다. 한지에 펜으로 쓰는 방식이었는데요. 일제는 1912년 ‘조선민사령’과 ‘조선형사령’을 공포해 일본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을 의용(依用·다른 나라의 법령을 그대로 적용함)하게 했습니다. 의용 민사소송법은 판결문에 넣어야 할 사항으로 주문, 사실 및 쟁점, 이유, 당사자 및 법정대리인, 재판소 등을 명시하도록 했고요. 의용 형사소송법도 판결 이유를 제시하고, 유죄판결의 경우엔 사실 및 증거, 적용할 법령 등을 적도록 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판결문이 일본어에서 한글로 바뀌었지만 일본어식 어미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라고 보여진다 할 것이다’ ‘…라고 보지 못할 바 아니라 할 것이다’ 등이 대표적인데요. 일본어의 ‘노데아루(のである)’, 즉 ‘…라고 할 것이다’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한글 가로쓰기로 문체 혁명

일제강점기의 판결문. 맨오른쪽 위에 ‘다이쇼(大正) 2년’이란 일본 연호가 보인다. <자료제공: 법원도서관>
해방 후에도 판결문 형식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자와 한글을 섞어서 띄어쓰기 없이 세로쓰기로 작성됐지요. 판결 선고 후 판사가 서기에게 판결 초고를 주면 서기가 먹지를 뒷면에 대고 초고를 베껴 판결서를 만들었습니다. 이 판결서에 판사가 서명날인을 하면 판결문 원본이 되는데요. 먹지를 대고 쓴 것은 판결문을 당사자들에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먹지를 이용한 방식은 판사들이 컴퓨터로 판결문 원본을 직접 작성하기 시작한 199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가로쓰기 판결문이 등장한 것은 1961년 5·16 직후입니다. 사건 수가 급증하던 당시 상황에서 타자기에 맞지 않는 한자·한글 혼용과 세로쓰기가 신속한 사건 처리를 막는 걸림돌로 떠올랐습니다. 1961년 말 조진만 대법원장은 정부 방침에 따라 법원의 모든 문서를 한글로 쓰고, 가로쓰기와 띄어쓰기를 하도록 하는 법원 규칙을 시행했습니다. 이에 대해 변호사협회에서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이유는 판결문 등에 기재되는 법률 용어가 한자인데, 한글 전용을 하게 되면 의미를 오해해 국민 생명과 재산에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우려 속에도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는 큰 무리 없이 뿌리내렸습니다.

1990년대부터 컴퓨터 활용

1952년 세로쓰기로 작성 된 대법원 민사 판결문. 한자·한글 혼용이었다. <자료제공: 법원도서관>
법원에서 판사들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보급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입니다. 판사들이 컴퓨터를 이용하게 되면서 사건 처리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습니다. 또 판사가 판결문 원본을 직접 작성함에 따라 판결 주문이 선고 전에 유출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없어졌습니다. 초기엔 글꼴이 ‘신명조’였다가 ‘휴먼명조’를 거쳐 법원에서 개발한 ‘판결서체’로 바뀌었습니다. ‘글자 크기 12포인트에 줄 간격 250%’는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 판결문에 표를 넣고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해 손해배상액 계산식을 삽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엔 서울지방법원 판사들이 컴퓨터로 판결문을 작성할 때의 애로사항 해결 방법 등을 담은 ‘판사가 컴퓨터를 만났을 때’라는 책자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1962년 타자기로 작성한 판결문. 한글 전용으로 바뀌었다. <자료제공: 법원도서관>
뒤이어 법원전산시스템이 정비되면서 판결문도 이 시스템을 활용해 작성하고 있습니다. 판사들은 전산시스템에 저장된 전국 법원의 판결문들을 손쉽게 열람해 재판에 참고하고 있습니다.

‘알기 쉬운 우리말로, 문장은 짧게’

판결문을 읽어보면 어려운 법률용어가 많이 나와 무슨 뜻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 때문에 법률용어를 알기 쉬운 우리말로 순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법제처는 2006년 법률 63건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년간 752건의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요. 이 중 486건이 개정됐습니다. 지난 4월에도 ‘난굴(亂掘)’을 ‘함부로 채굴하다’로, ‘지득(知得)하다’를 ‘알게 되다’로, ‘분장하다’를 ‘나눠 맡다’로 바꾸는 내용의 법률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2006년 서울고등법원 민사 판결문. 컴퓨터로 작성돼 프린터를 통해 출력된 것이다. <자료제공: 법원도서관>
법원도 판결문에 쓰는 용어를 우리말로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금원→돈’ ‘하자→흠’ ‘복멸하고→뒤집어엎고’ ‘형해화되고→있으나마나 하게 되고’ 등으로 바뀌고 있지요. 판결문에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였던 ‘각(각 피고들은, 각 비율로, 각 매매를)’과 ‘동(동년 동월 동시, 동인은, 동녀를)’의 사용도 자제하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것이 판결문 문장의 길이입니다. 문장은 글자가 50자 정도일 때 가장 읽기 편하다고 하는데요. 대법원에 따르면 1948년부터 1994년까지 판례집에 실린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한 문장에 사용한 글자 수가 평균 394.1자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문장 안에 평균 14.9개의 문장이 중첩돼 연결어미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판결문 읽다가 숨 넘어간다”는 표현이 절대 지나친 게 아니었던 셈입니다. 대법원은 문장을 짧게 쓰고 구두점을 적절히 찍을 것을 판사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거울이 된 판결문, 이런 게 있었다

판결문의 문체는 무미 건조합니다. 제3자의 눈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법률을 객관적으로 해석해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판사들의 육성(肉聲)이 판결문에 담기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고독한 심판자로서의 고민이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건데요. 이럴 때 판결문은 당대의 사회상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1955년 여대생 등 70여 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혼인빙자간음)로 기소된 박인수 사건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1심 재판장을 맡은 권순영 부장판사는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 판결문은 1950년대 전후(戰後)의 사회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77년 소액사건 상고 범위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민문기 대법관이 명문을 남깁니다. 그는 15 대 1로 소수의견을 내면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후 민 대법관은 10·26 사건 상고심에서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소수의견을 밝히고 법복을 벗었습니다.

96년 12·12, 5·18 사건 항소심을 맡은 권성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깼는데요. “자고로 항장(降將)은 불살(不殺)이라 하였으니 공화(共和)를 위해 감일등(減一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혀 화제가 됐습니다.

2000년 헌법재판소의 ‘과외 금지 위헌’ 결정 때는 이영모 재판관이 ‘반대’ 소수의견을 냈습니다. 그는 “지금은 가진 자 스스로가 자제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기며 사회, 경제적 약자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시기”라며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지요. 2007년엔 박철 서울고법 부장판사(현재 변호사)가 임대아파트 퇴거 요구를 받은 70대 노인의 손을 들어주며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9월 조병현 서울고법 부장판사(현 부산지법원장)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의 형을 낮췄는데요. “그토록 자랑스러워 했던 동생이 자살하면서 이제 해가 떨어지면 동네 어귀에서 촌부들과 신세를 한탄하는 초라한 시골 늙은이의 외양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