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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파트 60년]⑤ 32평형 부엌에는 식모 방도 딸려… 고급 아파트 원조격인 ‘이촌 한강맨션'

ngo2002 2021. 7. 7. 10:02

고성민 기자

입력 2021.07.05 11:00

 

 

 

[한국아파트 60년]

1958년. 한국산(産) 첫 아파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세워졌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전후(戰後)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로 지어진다. 고급 맨션이 유행하고 ‘건설 붐’으로 여의도·반포·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며 아파트는 우리나라 대표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아파트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기술까지 담긴 셈이다. [편집자주]

‘아파트 공화국’은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단어다. 아파트는 2019년 기준 국내 전체 주택 1812만7000가구 가운데 1128만7000가구(62%)를 차지하는 대중적인 주거 형태다. 때론 어느 아파트에 거주하는지가 사회적 지위도 반영한다. 국내에 아파트 붐을 몰고 온 단 하나의 단지만 꼽자면 1970년 준공된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이 주로 언급된다. 국내 최초로 준공 이전에 모델하우스를 지었고, 국내 최초로 프리미엄(웃돈)이 붙은 아파트 단지여서다.

◇해수욕장 같았던 그시절 ‘한강백사장’… 모래 위에 지어진 단지

지난 6월 29일 찾은 이촌동 한강맨션 전경. /고성민 기자

이촌동 한강맨션은 지하철 4호선·경의중앙선 인근 한강변을 따라 지어졌다. 지상 1~5층, 23개동, 660가구다. 이 땅은 과거 백사장이었다. 사실 노들섬도 원래는 섬이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 이촌동~노들섬은 드넓은 모래벌판으로 이어져 있었다. 당시 지도에 이촌동은 ‘한강백사장’으로 표기돼 있고, 조선 시대 이촌동은 ‘사촌(沙村·모래마을)’이라고 불렸다. 오랜 기간 서울시민의 여름 피서지로 사랑받은 공간이었다. 이촌동의 과거 사진을 보면 바닷가 해수욕장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1957년 8월 23일자 조선일보는 이같이 적었다.

근 한 달 계속된 장마로부터 해방된 서울시민들은 물밀 듯이 한강백사장을 나체로서 덮고 있다. 중고등 남녀학생으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벌거숭이의 인간 본연의 형태로 돌아간 것만 같다. 우글우글하는 인파는 마치 물 마른 개굴창의 미꾸라지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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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한강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 /1933년 7월 24일 조선일보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백사장을 메워 택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은 1962년 서울시 사업으로 시작했다. 하천부지를 택지로 조성해 주택난을 해소하고 인근 주택 침수 피해를 막으며 택지 매각으로 시비(市費)도 벌겠다는 구상이었다. 이 매립지에 이촌동 공무원아파트(1968년)가 준공됐다. 이후 공무원아파트보다 한강에 보다 가까운 땅에 건설부 산하 수자원개발공사가 1968년 다시 택지조성 작업을 펼친다. 이 땅을 대한주택공사(現 LH)가 매입하며 지은 단지가 한강맨션이다.

대한주택공사는 이 땅이 주택 대지로 최적지라는 점에서 부지를 매입했다고 한다. 임승업 주택도시연구원(現 LH토지주택연구원) 주택연구소장은 1970년 6월 ‘주택 제25호’에 “이 대지를 사업용지로 구상하게 되면서부터 더욱 구체적인 맨션아파트 계획이 착상됐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대지의 발견은 큰 역할을 했다”고 적었다. ▲시청까지 주행 시간이 10분 전후로 가깝고 ▲대지 동북쪽이 군부 및 공장으로 차단돼 각종 차량이 통과하는 지역이 아니며 ▲남쪽으로 한강을 바라보는 경관이 좋고 ▲당시 도시발전의 방향이 한강 이남으로 지향됐다는 점에서 주택부지로 최적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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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이촌동 전경. /서울사진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는 한강맨션 기공식에서 장동운 당시 대한주택공사 총재를 만나 “장 총재, 꼭 봉이 김선달 같구먼. 한강 모래 팔아 돈 버는 것 같아”라는 농담을 건넸고, 장 총재는 “주공의 공신력으로 집 장사를 좀 해야겠습니다”하고 웃어넘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최초의 모델하우스, 선분양… 중산층 주택의 기준이 되다

대한주택공사는 이 부지에 중산층을 위한 최고급 주택을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공 아파트는 저소득층을 위한 시민아파트로만 지어진 때여서 꽤 파격적인 구상이었다. 임승업 소장이 쓴 ‘주택 제25호’에는 공공도 중산층을 위한 고급 주택 공급에 나서야 한다는 대한주택공사의 고민이 읽힌다.

경제성장률이 유례없이 빠른 국가이고 개인소득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보면 국민들의 주택에 대한 욕망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중앙관서의 빈약한 주택정책으로서는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고….(중략) 무엇인가 주택공사가 다 하지 못했음을 절감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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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작성된 한강맨션 건설사업계획 대통령 보고서. '재원조달, 입주자 선모에 의하여 예매분양 수입금으로 충당'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대한주택공사의 가장 큰 고민은 공사비였다. 공공자금을 서민층이 아닌 부유층에 썼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어서다. 대한주택공사가 꺼낸 카드는 모델하우스를 통해 주택을 선분양해 건설비용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선분양이 일반적이지만, 후분양이 당연하던 당시엔 공급의 대전환이었다. 당시 장동운 총재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한강맨션 사업계획문서에는 ‘공사비 조달: 입주자 선모에 의해 예매 분양 수입금으로 충당’이라고 적혀 있다. 대한주택공사는 택지비를 제외하면 분양광고비 800만원과 견본주택 건립비 200만원만 쓰고 건설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강맨션의 고급화는 평면에 집중됐다. 우선 27~55평형으로 공간을 기존 아파트 대비 확 넓혔다. 32평형 이상에선 중산층 수요에 맞추기 위해 부엌 근처에 식모방을 조성했다. 당시 농어촌에서 서울로 상경한 젊은 여성들이 부유한 가정에 식모로 일하는 일이 많았다. 중앙난방을 도입해 온돌방이 전혀 없는 완전 입식 평면을 꾸린 것도 특징이었다. 당시엔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생활상이었다. 아파트 단지 외곽에는 담장을 설치하고 초소와 경비원도 배치했다. 아파트 관리를 맡을 회사나 기관이 없어 대한주택공사가 직접 아파트 관리를 담당했다. 차별화를 위해 미술계에 아파트단지 외벽 색깔도 자문했다. 대한주택공사가 1979년 발간한 대한주택공사이십년사는 이렇게 적었다.

학계 권위자, 미술계 권위자, 입주희망자 수십명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 결과 소위 주공칼라로 알려진 회색(일명 맨션회색)으로 결정되어 그대로 시행되었는데 이 주공칼라는 침착하고 점잖으면서도 그 나름의 멋도 있다는 평을 받았으며, 새로 건물을 지을 관계 기업들로부터 많은 문의를 받아 곳곳의 건물에 주공칼라가 퍼져 나갔다.

특히 50평형대는 당시 사회상으로 매우 호화스러운 주택이었다. 현재의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당시 5급 공무원의 1972년 기준 1호봉 월급은 1만7300원이었다. 한강맨션의 분양가는 27평형이 340만원, 51평이 645만원이었으니 호봉 상승 없이 단순 계산해보자면 27평형을 분양받으려면 약 16년, 51평형을 분양받으려면 약 31년이 필요했다. 서민들은 분양받을 수 없는 ‘꿈의 주택'이었던 셈이다.

◇분양가 대비 프리미엄 15~30% 붙어… 지금도 초고가 주택

한강맨션은 대한주택공사의 최초 선분양 단지여서 직원들이 최초로 분양에 발 벗고 나섰다. 장동운 총재는 2006년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분양을 촉진시키려고 주공 직원들에게 2만~3만원씩 활동비를 지급했다”면서 “한강맨션이 분양되지 않으면 감원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직원들에게 겁을 줬고, 직급별로 책임 분양을 유도했다”고 말했다. 한강맨션은 1969년 9월 15~30일 사이 진행한 1차 분양에서 전체 가구의 약 41%를 분양한 데 그쳤는데, 몇달 뒤 완판한 이후 국회의원들이 분양권을 달라고 청탁을 해오더니 1970년 7월 입주할 땐 벌써 프리미엄이 붙었다고 한다. 1970년 7월 15일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적었다.

최초에는 분양이 안 돼 주공 직원들에게 할당제 권유 판매를 시키는 등 입주자 유치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어느새 매진돼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었다. 분양가격 340만원의 27평짜리가 50만원, 395만원의 32평이 70만원, 분양가격 465만원의 37평이 110만원, 645만원 이상의 51평과 55평짜리엔 200만원까지의 프리미엄이 가산되어 매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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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30일 촬영된 이촌동 한강맨션의 모습.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분양가가 엄청나게 높다 보니 오직 부유층만 거주할 수 있었다. 위 조선일보 기사는 “아파트에 입주한 가구의 성분을 보면 전직 고관, 회사의 중견 간부, 실업인(実業人·기업인), 문정숙·강부자·전계현양 등 연예인, 도심지의 중산층 등”이 입주민이었다고 적었다. 한강맨션의 분양 성공으로 인근에 고가 아파트 건설이 잇따를 정도였다. 장동운 총재는 2006년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이 사무실로 저를 찾아왔어요.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되겠습니까’ 합디다. ‘무조건 되니까 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더니 정 사장이 한강맨션 인근에 있던 회사 부지에 아파트를 짓더군요. 정 사장은 큰 재미를 봤습니다. 그 이후에 삼익주택, 한양, 라이프주택 등이 잇달아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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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9일 찾은 이촌동 한강맨션의 모습. /고성민 기자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강맨션은 준공 50년이 지난 현재도 최고가 단지 중 하나다. 전용면적 89㎡(27평형)는 지난 4월 28억원에 거래됐다. 전용 120㎡(37평형)는 지난 1월 30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여전히 서울 최고가 주택 중 하나로 꼽히는 가격대다. 한강변이 주택 시장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고 북쪽으로 용산공원을 둔 입지가 부각돼서다. 또 재건축을 추진하며 신축 아파트로 변모한다는 기대감도 영향을 미쳤다. 2017년 재건축조합이 설립됐고, 사업시행인가를 앞두고 있다. 재건축 이후 지상 35층, 1441가구 아파트로 변모할 예정이다.

지난달 29일 찾은 이촌동 한강맨션은 한적한 분위기였다. 주공아파트에서 많이 보이는 수십년 자란 나무들이 아파트 키만큼 성장해 있었다. 빛바랜 ‘관리소·놀이터’ 표지판과 직사각형 반듯이 용적률 101%로 지어진 건물이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단지 바로 옆에 25층 규모 LG한강자이(한강외인아파트 재건축)가 있어 대비가 됐다. 한강맨션에서 1970년대부터 거주했다는 김모(76)씨는 “지금은 강남에 밀리지만, 당시엔 택시 타고 ‘한강맨션 갑시다’ 하면 택시기사가 얼굴을 두세 번씩 힐끗 쳐다보곤 했다”면서 “녹지가 많고 대지가 넓어 주거지로 안정감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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