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공수처의 올바른 이용사례 '홍콩의 염정공서'

ngo2002 2020. 5. 20. 15:24


History2・ 2019. 12. 1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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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청렴의 상징 '염정공서' 에 대하여 (한국의 공수처의 모델)

홍콩 염정공서를 다룬 TV 방영물


한국의 지금 혼란의 시작은 사실상 이 ㆍ고위 공직자 수사처ㆍ의 설립문제로 시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즉, 검찰개혁의 근본적인 목적은 '공수처'와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힘을 빼자는 논리이다.

현재, 공수처에 대한 국민의 의견은 거의 5:5 이다


그런데, 공수처가 고위공직자를 '대통령의 눈치를 안보고 진짜 잘 수사 할 수 있을 지' 에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만약 공수처에 소속된 직원을 청와대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채운다면 어쩌지 하나! 하는 의문 말이다.

일단 그래도 개인적으로 찾아 본 봐로는, 공수처의 모델로 그나마 가장 잘 운영되고 있어 보이는 홍콩의 '염정공서'를 알아보고, 거기에서 한국의 공수처에 대한 해법을 찾으면 어떨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1950~60년대, 영국 식민지 홍콩은 겉보기에는 일본과 함께 경제성장을 이루어 발전한 부유한 도시였으나 내부로는 총독부 관료부터 하급관리와 민간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썩은 최악의 부패도시였다.

1960년대 홍콩이 항구와 빈곤(홍콩인들은 나룻배 에서 살아야 했다)

​1. 한국의 '세도정치 시기'를 능가하던, 1950~60년대 홍콩의 부패상


홍콩의 빅토리아 섬에는, 롤스로이스를 택시로 사용하였고, '란콰이퐁이나 완차이 등'의 고급 클럽에는 여전히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 라는 현판을 내 걸고, 식민지의 특권층인 영국인들과 일부 친영 홍콩인들만이 '문란한 파티'를 벌이고 있었고,

홍콩 재벌들은 공산당을 피해서, 본토에서 홍콩으로 건너온 중국인들을 하인 아니 노예 부리 듯, 큰소리를 치며 사치를 일삼고 있었다.

1960년대 홍콩 의 모습

그러나 같은 홍콩이지만, 빅토리아섬 을 건너면, 바다 건너 구룡반도와 신계 등지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때 피난온 중국 대륙의 광동 성 주민들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베트남인 피난민들이, 배 위에서 살면서 그 질긴 삶을 어렵게들 이어나가고 있었고, 홍콩 섬의 '사치, 향락, 번영'은 완전히 남의 나라 일이었다.
이렇게 사회 자체가 아주 불합리했으니 부패는 당연한 거였다.

홍콩 부패를 일소한, 염정공서의 마크

이때 홍콩인들은 '차 값을 낸다' 는 말을, 뇌물의 은어로 사용한다.(한국에서의 떡값과 비슷한 말 이다) 당시 '홍콩의 경찰서장'은 소위 차 값(뇌물)만으로 평생 먹고살 돈을 벌었다는데 ,

이렇게 당시 홍콩 경찰은 마작을 하는 도박장을 삥뜯어 돈을 벌었다.

그리고 다른 홍콩의 관공서도 비슷해서, 소방서에선 無錢無水(돈이 없으면 물도 없다)라며 뒷돈을 안 주면 소방호스를 안 열어 줄 정도였고, 구조작업 등을 했을 때는 당연히 수고비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방서의 구급대도, 소위 기름값 을 챙겼다.

이는 민간병원도 마찬가지여서, 뒷돈을 찔러줘야 의사가 와서 진찰을 해 주고, 입원실이나 수술 등을 할 수 있었다.

민간 기업도 채용 시, 당연히 면접관에게 찻값(뇌물)을 건네야 합격이 되었고, 차 값을 내지 않으면 합격해도 발령을 내지 않았었다.(이거 한국의 세도정치 시가와 똑같다)

학교 선생들도, 중국계는 당연하고, 영국인 선생님도 당연스럽게 아니 반드시 촌지를 챙겼다.
사법부는 더 심각해서, 재판 역시 뇌물만 있으면, 무죄가 될 만큼 부패해 있었다. 홍콩의 판사들은 영국인, 중국인 할 거 없이 모두 다 썩었었다.
본국인 영국도 '영국병을 앓으며 부패로 몸살을 앓던 시기' 였으니 홍콩 역시 그러한 부정부패가 심각했던 것은 당연했고,

홍콩 사람들도 그러한 부정부패를 어느새 '당연한 것' 으로
인식할 정도에 이른다.

2. 홍콩의 부패의 환부가 폭발하다.
그렇게 부패가 쌓일대로 쌓였는데, 1973년 영국출신의 홍콩 경찰 간부였던 '피터 고드버'(葛柏)라는 작자가, 무려 430만 홍콩 달러(현 가치 80억 정도)를 수뢰 및 횡령한 후,

홍콩 당국의 출국금지를 무시한 체, 영국으로 튄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분노한 홍콩 시민들은 일제히 시위를 벌이며, 영국과 홍콩 총독부에 '고드버'를 당장 홍콩으로 재송환 하라고 들고 일어난다.

사실 '고드버' 한명 잡자고 시작한 시위가, 커지고 커지면서, 급기야 홍콩시민들의 그간의 총독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다.

그간 불합리하던 홍콩사회의 부패와, 억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까지 커져 버리는 데, 이 운동을 시작으로 현 '홍콩시민'은 민주화 운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 저항운동은, 훗날 홍콩을 아시아 최고(The best of Asia)라는 소리를 듣는 곳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자 현재, '반 중국 민주 홍콩 시위'를 가져온 시발점이 된다.(한국의 4.19 혁명 쯤 되는 사건)

홍콩의 민주화는 '염정공서' 로 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홍콩인의 엄청난 저항에 굴복한, 영국은 홍콩 총독 산하에 '독자적인 반부패 수사기구인 염정공서'를 세운다. 이후 염정공서의 서슬 시퍼런 부패단속과 지속적인 대국민 홍보로 인해, 1980년이 되면 홍콩의 부패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홍콩은 '부패제거와 높은 경제자유도'를 토대로, 영국병을 앓으며 몰락하는 영국보다도 더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아시아 최고의 국제도시가 된다.


3. 홍콩의 '염정공서' 에 대하여

1973 ~ 1974년을 사이에 두고 홍콩의 '부패방지 3륜법과 염정공서' 등 반부패와 관련된 밥과 제도들이 생겼났고, 영국 식민지라는 이점으로 경제적인 번영은 누렸으나, 내부는 후진적 / 부패로 얼룩진 이었던 당시 홍콩을 진정한 선진도시로 바꾸었다.


이 당시에 '반부패 운동과 함께 홍콩을 청결하게 하는 클린 홍콩 운동' 까지 벌어졌으며, 경찰의 경우 부패한 경찰은 해고되고, 젊은 건강한 경찰관이 새로 채용되었다.


반부패 정책에 있어서는 외국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의 노력도 벌였고, 그 노력은 1980년이 되자 결실을 맺었다. 비로서 우리가 아는 그런 홍콩이 된 것이다.

이때 쯤, 홍콩은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먹고사는 문제도 그럭저럭 해결되고, 부패 자체가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당연히 현재 홍콩인들은 그때의 부패상은 상상도 못 한다.

물론 염정공서 도입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부패 경찰 해고에 대해, 홍콩경찰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실제로 1977년 10월 28일에는 경찰관들이 '염정공서 건물'에 난입해 유리창을 부수고 직원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를 속칭 경렴충돌(警廉衝突)이라 한다. 이 후 경찰과 염정공서와의 충돌은 2002년, 2010년에도 있었다.

최신자료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홍콩의 '부정부패 쇄신 프로젝트'는 염정공서 출범 10년만에 최악의 부패도시에서 최고의 청렴도시로 환골탈태 한다.

염정공서는 이외에도 부패방지 확산을 위한 포스터와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으며 TVB와 합작해서 드라마도 제작하는 일도 하고 있다.

그 드라마가 1994년부터 2016년까지 2년마다 7개의 시리즈로 제작한 염정행동 시리즈가 있다.

홍콩 염정공서 관련 신문기사

4. 홍콩 염정공서의 한계

2003년 7월에 홍콩 연예계의 고위 인사들을 부정부패 혐의로 수사했지만 아무 성과도 못냈고, 2010년도엔 前 TVB 사장 스티브 찬(陳志雲)을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에 넘겼지만

2013년 무죄 선고를 받아 결과적으로 헛일이 된 흑역사가 존재한다.

2007년 조사결과에 따르면 홍콩인의 99%가 ICAC(염정공서) 를 신뢰한다고 한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수사 대상이 경제·행정에서 정치 쪽으로 선회함과 동시에 ㆍ여러 헛수고와 피의자 조사수법 등이 비판을 많이 받으며 인터넷 상에서는 예전만큼의 지지를 못 얻는 듯하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염정공서가 실패했다는 오해를 할만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홍콩은 여전히 싱가포르, 일본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청렴한 곳이다.

고질적인 부패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에선 분명 홍콩의 반부패 정책을 배울 필요가 있다.
5, 홍콩의 염정공서의 부활

2016년부터 염정공서가 다시 옛 명성을 되찾고 있는데, 2012년부터 시작한 썬 홍 카이 그룹이 연루된 '전직 행정장관 도널드 창'의 뇌물사건 수사 결과, 마침내 2017년 2월 도널드 창을 감옥에 쳐넣는데 성공한다.


사실 상 미니국가인 홍콩의 특성 상 전직 대통령을 순전히 전횡 혐의로 감옥에 보낸 것이다.


전 행정장관 도날드창 구속

​2011년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에 의하면 홍콩은 12위로 싱가포르에 이어 아시아 2위를 기록했다.

< 한국의 공수처 법안과 홍콩의 염정공서와 비교 >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진 것은 한국의 공수처 밖에는 없다.

■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부패수사 기구는 '공수처' 밖에는 없다


한국에도 현재, 부정부패 전담기구인 '국민권익위원회'가 있다. 하지만 권익위원회의 수사는 강제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감사원도 있지만 신고해도 증거 없이는 잘 받아주지 않는다.

당신이 답하기엔 부끄럽지 않은지

한국도 홍콩 같은 특별 부패수사기구나 미국의 FBI같은 특별수사청이 몇 번 설치될 뻔했으나, 검찰이 반대해서 실패해 왔는데 1차적으로는 권력을 나누기 싫어하는 탓이 크지만

'검찰 본인들' 에게도 떳떳치 못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막는 측면도 강하다.
그러나 '김영란 법' 제정 이후, 한국의 부패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고, 공수처에 대한 요구도 한창 무르익고 있어서, '홍콩의 염정공서의 사례'는 우리나라에 큰 반면교사가 될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


■ '홍콩의 염정공서와 한국의 공수처'는 '기소권' 이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즉 염정공서는 강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권은 없는데, 한국의 공수처는 기소권 도 있고 ㆍ강제 수사권을 가진 다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공수처가 설립이 되면 검찰이 고위 공직자에 대해서는, 수사를 할 수 없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검찰과 공수처가 상호 경쟁을 하는 편이 나은데...)

결국 조직이 작은 '공수처'를 정권이 장악하면 ㆍ오히려 공직자 수사는 더욱 어려워 질 수 있다는 말 이다.

즉, 한국은 염정공서와 같은 공수처를 설립하되,

a) 공수처에게 기소권을 주는 경우라도, 검찰도 계속해서 고위공직자를 수사할 수 있게 해서(검찰에도 고위 공직자 수사 전담팀을 구성하게 한다), '공수처와 검찰간 상호간 경쟁' 을 하게 하든지,
(누가 더 경쟁력이 있는지...test 할 겸/ 더 많이 승소한 쪽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 )

b) 공수처는 강제 수사권 만 인정하고 기소권은, 검찰에게 맡겨서 '상호간 권력균형'을 이루던지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한다.(공수처는 기소권을 없게 하든지...)
다만 a항은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당연히 반대할 것 이다ㆍ근대 이게 국민에게는 제일 좋다ㆍ

두 기관(검찰과 공수처) 이 눈에 불을 키고 고위공직자들을 수사하면 부패는 사라질 텐데 ㆍ이 방법은 민주당 ㆍ정의당 등 다들 피하려 한다ㆍ겁장이들!


한국의 '공수처'가, 고위공직자에 대한 '기소 독점권'을 갖는 것 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즉 공수처의 기소에 대한 규제는 있어야 한다)


공수처만 고위공직자에 대한 기소권과 수사권을 갖으면ㆍ권력자는 공수처를 반드시 장악하려 할 것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주는것은ㆍ 레비아탄 ㆍ을 만드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선진국의 '공수처' 같은 기관은 사실상 기소권은 가지고 있지않고, 강제 수사권만 가지고 있다 ㆍ홍콩의 염정공서 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경찰 역시 강제 수사권만 가지고 있지, 기소권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