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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리는 하늘·땅이 감추는 법
견불견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풍수적인 견해를 말한다.
당연히 보이는 것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보이지 않는다면 영향이 있더라도 미미하다는 풍수적 대원칙이다. 똥이 길바닥에 널 부러져 있어서 보이면 더러운 것이고 땅을 파서 묻어버리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것처럼, 흉한 것이라고 해도 보이지 않으면 흉함이 없거나 미미하다는 것이다.
풍수학에서는 모양과 색깔에 따라 고유한 기운을 갖고 있다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날카로운 유리조각이나 칼이 나의 눈 5cm 앞에 있다면 오싹함을 느낄 것이다. 유리조각과 칼은 날카로운 기운을 갖고 있어서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빵이 눈앞에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흉측한 산이거나, 아름답지 못한 건물이거나, 나를 공격하는 형상이거나, 보기 싫은 모양이거나, 방정하지 못한 모양이 보인다면 나쁘거나 좋지 않은 기운이 나에게 뻗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비록 그런 모양이 있다고 해도 나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 반대로 빼어난 산이거나, 멋있는 산이 보인다면 그로부터 상서로운 기운이나 좋은 기운에 감화를 받게 되며, 아무리 수려한 산이나 방정한 건물이 있다고 해도 나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그 영향은 미미하다.
견불견의 원칙에서 비보풍수(裨補風水)가 발전하였다. 세상에 풍수이론으로 완벽한 명당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얼마간의 결함이 있는 땅에 거주하면서 살기에 보다 적합하도록, 보다 좋은 조건이 되도록 그 결함을 풍수적으로 완화시키고 보완시키고자 한 것이 비보풍수이다.
비보란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짧은 것은 붙여서 길게 만들고, 낮은 것은 더하여 높게 만들고, 약한 곳은 덧붙여서 보하고, 터진 곳은 조산(造山)을 만들어 막고, 가려야 할 곳은 송림을 조성하거나 대나무를 심어서 차폐·통풍시킨다.
명당은 찾는 것이지만, 비록 모자란 곳이라 해도 노력을 통하여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천지는 엄격한 법칙에 의해 운행되지만, 인간은 사고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순화시키는 행동을 유발시키는 능동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견불견 원칙은 인간이 가진 눈의 중요성을 매우 높게 평가한 것이며, 보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생활의 대부분임을 확인해 줌과 동시에 눈을 통하여 기운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길지가 있다고 해도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는다는 가설이 있다. 즉, 하늘이 감추고 땅이 비밀로 한다는 것은 권선징악의 기준이 있어서 악인에게는 천지가 명당을 주지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비기를 전하지 않는다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이 바로 천장지비와 맥이 닿아있다.
이는 이익을 좋아하는 일반 사람들의 속성에 비추어 자기의 이익을 넘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적 메시지이다. 사욕은 억지와 부자연스러움과 탐욕에 오염되지만, 공동선은 희생하고 봉사하고 화합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자연스럽고 밝은 세상을 만들어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준다. 이것을 풍수적인 설화에서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교훈으로 전해지며, ‘활인적덕(活人積德)’이라는 교훈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상당히 의도적이고 도덕적인 냄새가 난다.
명당을 찾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사랑이 충만한 인간이 되어야 함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풍수학의 저변에는 동아시아인의 정서적 기대감이 반영되어 있지만, 결코 동화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사상의 결실이다.
풍수학은 땅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 자리를 찾는 것이므로 유물론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지만, 천·지·인의 역할을 조화시켜 놓고 있어서 유심론(관념론)을 적절히 조합하여 살아 있는 학문으로써, 생동감 있는 학문으로써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풍수학도 사람을 주인공으로 형성된 학문이다. 풍수학은 공간학문이지만 시간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하늘과 땅도 제 나름대로 고유의 역할을 분담하여 상호견제하고 있어서 인간에게 희생하고 화합하는 본연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풍수학에서는 자연과학이 지닌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초월하여, 대립이 아닌 화합을 요구하는 삼분법적인 사고체계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삼재사상이다. 이 삼재사상은 대한민국 고유의 사상으로써 삼태극과 삼족오, 삼신사상과 같이 하늘과 교류하는 사고체계이다. 공교롭게도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상통한다.
고로 천장지비의 원칙은 명당을 의뢰하는 사람이 돈만 많은 악인이라면 제 아무리 명사(明師)라고 해도 - 이 경우 유명한 명사(名師)가 아닌 지혜가 밝은 명사(明師)이다 - 명당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공지사항이다. 돈이 많아서 최고의 풍수사를 초빙할 수는 있다고 해도 하늘과 땅이 명당을 숨겨버린다는 말이다. 이러한 종류의 풍수설화가 꽤 많이 전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즉 우주자연이 인간사에 일일이 참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방관하지 않고 있다는 가설이다.
천장지비란 자연의 원리에 입각한 엄격한 운행방식으로 인간을 견제하는 하늘과 땅의 소극적인 작용이다. 실제로 인간의 욕심이 자연의 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를 볼 때 가장 소극적인 제재인 것 같지만 매우 강력한 제재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것은 풍수학에서 천장지비는 좋은 곳만 감추는 것이 아니라 흉한 곳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즉, 함정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권선징악의 틀을 짜 놓고 있다. 이를 도가에서는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고 한다.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경우 하늘과 땅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는 무서운 경고이다.
■길한 것은 좇되 흉한 것은 피해야
풍수학은 길함을 쫓고 흉함을 피하기 위한 기술이라고 하지만, 흉한 것을 피하는 것이 먼저이다. 천장지비는 길지(吉地)를 아무나 차지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제재수단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풍수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최소한 흉(凶)은 피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복을 좇는 것보다 흉을 피하는 것에 무게를 두게 되는 이유이다.
고전에 전하기를, 화흉위길(化凶爲吉)이라고 했다. 흉을 길로 만든다는 의미인데, 결론은 이것이 쉽지만은 않다는데 있다. 이는 비보풍수의 목표이지만 결과론적인 행위가 아니라 소극적인 희망이다.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자연은 인간과 상관없이 운행된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추위와 더위를 몰고 다닌다. 사계 속에서 생물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결실을 맺으며 혹독한 시련을 맞이하기도 한다. 인간이 사계절에 어떻게 적응하며 행동하느냐에 따라 길흉이 생긴다. 이를 길흉유인(吉凶由人)이라 한다. 길흉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각과 선택과 행위에 기인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고, 돌을 아무리 갈아도 다이아몬드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길함을 취하고 흉함을 멀리하며, 전화위복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교훈이다. 하늘이나 땅이 의도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 자기의 노력으로 성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땅이 좋은 곳이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나쁜 곳이면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강이 범람하기 쉬운 곳에 자리를 잡았거나, 산사태가 날 가능성이 높은 곳에 집을 지었거나, 태풍이 지나가는 자리에 집을 지었다면 곤란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풍수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길흉의 마지막 결정권은 하늘이 쥐고 있는 것이다.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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