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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원권 10년.. 경조금은 인플레, 수표 발행 이자는 1조원 아껴

ngo2002 2019. 6. 8. 11:15

오만원권 10년.. 경조금은 인플레, 수표 발행 이자는 1조원 아껴

권승준 기자 입력 2019.06.08. 03:01

{아무튼, 주말]
보름 뒤 발행 10년 오만원권의 사회학

안녕! 내 이름은 신사임당, 아니 5만원권 지폐야. 2009년 6월 23일 정식으로 세상에 나왔으니 얼마 안 있으면 꼭 만 열 살이 되지. 선배인 세종대왕, 아니 1만원권이 1973년생이니 36년 만에 태어난 후배인 셈이야. 그 사이 물가는 36배, 국민소득은 150배나 뛰었다고 하더라고. 1만원권보다 금액이 크고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보다 쓰기 편한 고액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커진 덕분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어. 물론 나의 탄생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지. 내가 양지보다 음지에서 살게 될 운명이라느니, 사과 상자나 트렁크 같은 곳에 주로 담겨 있을 운명이라느니 하는 걱정이었어. 요즘엔 박카스 상자나 마늘밭에 날 묻어두는 경우도 생겨났다고 하던데. 변명은 하지 않을게. 그게 내 잘못은 아니란 거 알지? 날 나쁜 용도로 쓰려는 사람들의 잘못이지.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좋다는 사람도 많아. 우선 내 이야기부터 들어줘.

일러스트=안병현

경조금 봉투, 지갑을 날씬하게 해준 일등 공신?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5만원권은 37억1878만장(약 185조9392억원)이 발행됐다. 이 중 한국은행 금고로 되돌아온 것이 절반쯤 된다. 현재 시중에 풀려있는 5만원권 발행 물량(총발행량에서 한국은행에 돌아온 것을 뺀 것)은 약 18억9500만장(94조7500억원)으로, 모든 지폐 중 가장 많이 풀려있다. 그만큼 많이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5만원권이 세상에 나오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다. 2009년에 307만 건이었던 이용 횟수가 작년 31만 건으로 급감했다. 이전 최고액권이었던 1만원권도 지난 10년간 꾸준히 유통 물량이 줄어드는 추세다. 5만원권이 이들의 용도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한국은행이 전국 1100가구를 대상으로 한 ‘화폐 사용 행태 조사’를 보면 특히 결혼식·장례식 등에 내는 경조금(82.4%)이나 세뱃돈 등 개인 간 돈거래(51.7%)에 5만원권을 쓰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집에 예비용으로 보관하는 현금도 전체의 79.4%가 5만원권이었다. 반대로 5000원권과 1000원권은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조사에선 쇼핑 등의 결제 수단이나 경조금에선 5000원권과 1000원권을 쓰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을 정도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1100가구 샘플 조사다 보니 실제와 어느 정도 오차가 있기 마련”이라며 “질문이 ‘쇼핑을 할 때 주로 쓰는 지폐가 무엇이냐’는 식으로 질문을 했기 때문에 0%가 나온 것인데, 그만큼 5000원권이나 1000원권을 쓰는 경우가 드물어졌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5만원권 발행 당시 큰 우려 중 하나가 경조금 등에 예기치 않은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란 지적이었다. 이 우려는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5만원권 도입 전후로 경조금 등 개인 간 이전 지출액이 급격하게 늘었다. 월평균 가계 지출 조사를 보면 가구당 경조금이나 세뱃돈 등의 명목으로 월 16만4800원(2007년), 16만7800원(2008년) 정도 지출하던 것이 2009년 18만5400원으로 크게 증가했고 이후 19만원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다. 회사원 김영균(55)씨는 “예전에는 조카 세뱃돈이나 결혼식 축의금으로 3만원씩 내는 일도 흔했는데 5만원권이 나온 후로는 암묵적으로 경조금 하한선이 5만원으로 고정되고, 요즘엔 좀 친분이 있는 경우엔 10만원까지 기본선이 올라간 것 같다”고 말했다.

5만원권 덕분에 일어난 소소하지만 큰 변화 중 하나는 지갑이 점점 얇아지거나 아예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5만원권 도입과 신용카드 사용이 보편화되는 일이 맞물리면서 두툼한 지갑 대신 카드 지갑이나 지폐 몇 장만 끼워 다니는 얇은 머니클립이 직장인들 사이에 대세가 됐다. G마켓 관계자는 “2014년을 기점으로 장지갑·단지갑 판매량과 카드지갑·머니클립 판매량 순위가 뒤집힌 후 이제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하경제 키운 주범?

마늘밭, 장난감 인형, 가마솥 아궁이, 음료수 상자…. 매년 국세청이 고액 탈세자들을 추적 조사할 때마다 5만원권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등장한다. 지난 5월 적발된 고액 탈세자 중에는 집안 싱크대 수납장에 5만원권으로 5억원을 숨기거나 장난감 인형에 7100만원을 숨겼다가 걸리기도 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탈세자들을 조사해보면 대여 금고나 장롱 같은 곳은 기본이고 가마솥 아궁이 안이나 마룻바닥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온갖 방법으로 5만원권을 숨긴 사례가 꼭 나타난다”고 말했다. 2011년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110억원어치의 5만원권 다발이 발견된 사건이나 고(故)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이완구 전 국무총리에게 건강 음료 박스에 5만원권 다발로 3000만원을 넣어 전달했다는 의혹 등도 잘 알려진 5만원권 활용(?) 사례다.

그렇다면 시중에 잠자고 있는 5만원권 다발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간 5만원권의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수십조원에 이를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5만원권의 환수율 때문이다. 10년간 185조원어치가 발행됐는데, 그중 한국은행 금고로 돌아온 건 91조원 정도로 환수율은 50%에 못 미친다. 1만원권이나 5000·1000원권의 환수율은 91~100% 수준이다. 지폐는 통상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면 개인→기업→금융권을 거쳐서 한국은행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한국은행을 떠난 지폐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시중 어딘가에 잠자고 있단 뜻이다. 한국소시에테제네럴(SG) 증권 오석태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0년간 한국은행의 최대 정책적 실수가 바로 5만원권 발행”이라며 “경조금 등에 쓰는 걸 제외하면 발행된 5만원권 중 많은 양이 비자금이나 탈세 목적으로 쓰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불거진 화폐단위 개혁(리디노미네이션) 논의도 5만원권과 지하경제가 핵심 중 하나다. 화폐단위 개혁은 경제 발전 등으로 화폐단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수정하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1000원을 1원으로 낮추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화폐단위를 개혁하게 되면 기존 지폐(구권)를 신권으로 교환해야 하기 때문에 금고에 숨겨둔 돈도 어쩔 수 없이 바깥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금융계에선 “부자들이 리디노미네이션을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집 안에 쌓아둔 5만원권을 들킨다는 점”이라는 우스개가 유행할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환수율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란 점이다. 2014년 25% 수준까지 떨어졌던 환수율은 작년 70%까지 올라왔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2015년부터 매년 5만원권을 20조원어치 이상 찍어내며 공급량을 크게 늘렸다”며 “이 덕분에 시중 수요를 넘어서는 여유 공급분이 가계와 기업, 은행을 거쳐 다시 한국은행으로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환수율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5만원권 발행으로 매년 1조원씩 돈을 버는 주체가 있다는 것도 뜻밖의 장점이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가 그 수혜자다. 과거엔 은행이 10만원권 수표를 발행할 때마다 한국은행에서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했다. 시중에 10만원권 수표가 많이 풀리면 물가 상승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완화하기 위해 한국은행은 통화안정증권으로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한다. 5만원권이 없었다면 10만원권 수표를 흡수하기 위한 통화안정증권의 이자 비용이 연간 약 1조원에 이르렀을 것이란 추정이 경제학계의 중론이다. 올해 기준 정부 예산 규모가 약 469조원인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돈이다. 즉, 정부가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지급해야 할 비용을 신사임당, 아니 5만원권이 아껴주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