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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택동(毛澤東·마오쩌둥)’이 ‘화국봉(華國鋒·화궈펑)’에게 적어준 세 문장이다. 마지막 문장은 모택동 사후 화국봉이 정권을 잡는 데 유훈(遺訓)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화국봉은 성과 이름을 모두 바꿨던 인물이다. ‘소주(蘇鑄·쑤주)’가 본명이다. 화는 17세이던 1938년 이름을 바꿨다. ‘중화항일구국선봉대(中華抗日救國先鋒隊)’에서 둘째와 여섯째, 여덟째 글자를 뽑아 ‘화국봉’으로 개명했다. 항일전쟁에 몸을 바치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화를 실각시킨 ‘등소평(鄧小平·덩샤오핑)’의 ‘소평’도 원래 이름은 아니다. ‘개화된 등씨’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던 부친 ‘등문명(鄧文明·덩원밍)’은 아들에게 ‘선성(先聖·셴성)’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성인을 앞서라’는 야심에서다. 그러나 ‘소평’이 다섯 살 때 ‘이름이 과(過)하다’고 생각한 가정교사의 제안에 따라 ‘희현(希賢·시셴)’, 즉 ‘현자가 되고자 한다’로 눈높이를 낮췄다. ‘소평’이 된 건 스물세 살 때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국민당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작고 평범한 등씨’라는 ‘등소평’이 됐다.
이름엔 바람이 많이 담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때 태어난 이들에겐 ‘건국(建國·젠궈)’이나 ‘국경(國慶·궈칭)’ 등과 같은 이름을 즐겨 붙였다. 1950년대 한국전쟁 때 중국은 ‘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 집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자(抗美援朝 保家衛國)’를 참전의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자연히 ‘위국(衛國·웨이궈)’ ‘위민(衛民·웨이민)’ 등의 이름이 유행했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1980년대 이후엔 예쁜 이름을 선호했다. ‘나(娜)’ ‘려(麗)’ ‘신(晨)’ ‘비(飛)’ 등. 이름처럼 아름답게 살라는 염원을 실었다. ‘이름(名)’은 원래 어두운 ‘밤(夕)’에는 서로를 알아보기 어려우므로 ‘입(口)’으로 상대를 외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국의 김길태는 ‘길에서 태어나’ ‘길태’가 됐다고 한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유상철 중국연구소 소장
유상철 기자 [scyo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