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수출 대기업들의 재고가 급증하는 가운데 지난해 말 현대차 울산 야적장에 수출될 차량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승환 기자]
"반도체 가격이 점점 떨어지니 고객사들이 가격을 깎아달라고 대놓고 압박을 합니다. 국내 업체들 재고도 많아 소진해야 하는데 초과 공급된 상태라 반도체 가격이 언제 반등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11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에선 재고 처리 문제에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데이터 투자 계획을 속속 연기하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데이터센터 설립이 늦어지면 그만큼 D램 수요는 감소할 수밖에 없는데 공장 가동률은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생산을 중단하면 비용이 오히려 더 발생하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 중 낸드플래시의 공급과잉이 심각한 상황인데 국내 업체들은 모두 1년 새 재고량이 2배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A반도체 관계자는 "재고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이 고객사에 알려지면 가격협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내색도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는 약정기간이 끝나지 않아도 스마트폰을 바꾸는 사례가 많을 정도로 폭발적인 수요가 있었지만 요즘은 주변에 그런 사례를 찾기 힘들다"며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업체도 데이터센터를 확충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국내 완성차 업체 B사는 최근 노사관계 불안과 판매 부진으로 재고가 쌓여 연초부터 대대적인 할인에 들어갔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실제 이 회사의 경우 지난해 1월에는 4만4000여 대를 생산해 4만2000여 대를 판매했지만 올해 1월에는 4만6000대를 생산해 3만8000여 대밖에 판매하지 못했다. 이 같은 현상이 매달 반복되면 자동차 회사들은 보통 할인율을 높이게 되는데, 이 경우 재고는 소진되지만 수익성이 악화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최근 수출 주력 업종인 반도체와 자동차의 부진에 따라 재고가 급증하며 올해 단기 실적 부진은 물론 장기적인 재무구조 악화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삼성전자의 작년 말 기준 재고자산은 28조9847억원에 달한다. 매출 대비 재고율은 11.9%로 전년도(2017년·10.4%)보다 1.5%포인트 높아졌다. 수출기업으로서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20곳의 평균 재고율이 같은 기간 0.9%포인트 증가한 것과 비교해도 재고 부담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전통적으로 미국 지역 매출 의존도가 높은 가운데 최근 중국 지역 매출이 늘어나며 작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미·중 무역전쟁 여파를 고스란히 겪고 있다는 분석이다. 작년 삼성전자 전체 매출에서 중국 지역 매출 비중은 17.7%로 2017년(16%)보다 의존도가 심화됐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작년에 `슈퍼 호황`을 예상해 정책적으로 재고를 많이 늘린 측면이 있지만 올해는 투자계획 조정 등으로 자연스레 감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고가 감소해도 수익성 하락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반도체 시장조사 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달 말 D램(DDR4 8Gb 기준)의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개당 5.13달러로 한 달 전인 1월보다 14.5% 떨어졌다. 올 들어 두 달 동안 가격이 30% 이상 급락한 것이다. 애초 증권가 예상치(-19.5%)를 크게 웃돌고 있다.
일부에선 올 2분기 가격 반등을 예상하는 `낙관론`도 있지만 반도체 업체들의 재고 증가 속도가 심상치 않다는 분석이다.
SK하이닉스의 작년 재고는 4조4227억원으로 최근 2년 새 2배 이상 급증했다. `슈퍼 호황`이 지속될 것을 예상해 재고를 늘렸는데 갑자기 제품을 판매할 곳이 사라진 셈이다. 이 업체의 작년 기준 전년 대비 재고 증가율은 무려 67.5%에 달했다. 같은 기간 매출이 34.3% 늘어났지만 재고 증가 속도가 매출보다 2배가량 빠르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4분기에 많이 늘어난 메모리 재고 수준은 1분기에도 줄지 않고 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가격 하락 등 영향으로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37조4356억원)은 작년(58조8867억원)보다 36.4% 급감할 전망이다.
분석 대상 20곳 중 작년에 재고자산 규모가 10조원이 넘은 곳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차(10조7148억원)와 포스코(11조4999억원)다. 현대차는 삼성전자와 비슷하게 미국과 중국 의존도가 높은 데다 재고를 소진하려면 수출 시장에서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크게 떨어져 있다.
작년 기준 현대차의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0.5%에 불과한데 재고 증가율은 4.2%에 달했다. 재고 증가 속도가 매출보다 9배가량 빠르다.
이에 따라 한때 10%를 넘나들던 현대차 영업이익률은 작년 2.5%까지 하락했다. 다만 올해는 적극적인 재고 소진과 신차 출시 영향으로 영업이익률이 3.7%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기아차 부진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등 계열사로까지 전이되고 있다. 작년 현대모비스의 매출은 전년 대비 제자리였는데 재고자산은 2.7% 증가했다.
현대글로비스 역시 매출 증가율(3.1%)보다 재고 증가율(38%)이 과도하게 높았다.
석탄 철광석 등 각종 원재료가 재고자산에 포함되는 포스코는 전통적으로 높은 재고율을 갖고 있다. 작년 기준 재고율은 17.7%다. 철강 시장 역시 중국이 좌우하고 있는데 철강 공급 과잉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국내 제철사들의 재고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일호 기자 / 문지웅 기자 / 용환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