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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걸출한 2인자들

ngo2002 2018. 3. 1. 11:27

세계의 걸출한 2인자들| ☞ 종합게시판

김재철 | 조회 6 |추천 0 | 2005.06.23. 11:06

세계사의 걸출한 2인자들


마오쩌둥(毛澤東) 시절 중국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 탄생 1백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에 걸쳐 저우언라이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가 줄을 이은 까닭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천안문(天安門) 앞에 서 있는 저우언라이 추도시비에 아로 새겨져 있다.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


이 시구는 한 지도자에게 보내는 최고의 역사적 찬사이며,  그가 차지할 수 있는 영원한 명예이다.  그는 중국인의 시각으로는, 군벌과 열강의 압제와 약탈로 중국인의 생존이 위태롭고 일제의 침략과 국공내전으로 중국 산하가 파멸 위기에 직면했을 때 중국인에게 위대한 희망을 품게 하고 그것을 실현시킨 「인민의 벗」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78년의 생애를 몇 가지만 더듬어보면  우리는 저우언라이 추모열풍의 역사적 궤적을 찾을 수 있다. 
  5·4운동에 참가한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유학시절인 192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1924년 귀국, 쑨원(孫文)의 광둥혁명(廣東革命)에 참여했다. 그는 중국공산당과 홍군이 장제스(蔣介石)의 포위공격을 피해 이른바 「대장정」에 나선  시기에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그때까지 적대적 입장에 있던 마오쩌둥이 당권을 잡도록 지지하고, 죽을 때까지 마오쩌둥을 도왔다. 
  1936년 겨울 장제스가 시안(西安)에서 장쉐량(張學良)에게 연금되자 그의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통일전선(抗日統一戰線)을 성립시킴으로써 항일전의 승리는 물론 그 뒤 중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것도 그였다. 1949년 신중국의 총리로 발탁되어 행정의 차원에서 신중국의 뼈대를 세운 것도, 1950년 중·소(中·蘇)동맹조약, 1954년 6·25전쟁과 월남전쟁에 관련된 제네바회담을 성사시킨 것도 그의 공로다. 
  1955년 반둥의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성립시켜 중국이 제3세계에 대한 지도력을 확보한 것도, 1966년부터 10년 동안 「문화대혁명」의 대광란을 수습한 공도 그의 차지다. 키신저와 교섭하여 1972년 미국과 중국의 대화해의 서곡인 닉슨과 마오쩌둥의 회담을 성사시키고 1975년 월남전을 종식시킨 파리회담을 성립시킨 공도 그의 몫이다.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실현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오늘날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의 초석을 깔아준 것도 그의 공로다. 그는 항일전, 국공내전과 중국통일 뒤의 전과정에서 정치·외교·군사·경제·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빼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신중국의 건설자이다. 그는 신중국 성립으로부터 총리재직 26년 3개월, 준의회의로부터 41년 동안 부동의 제2인자로 우뚝 서 있었다. 


패왕(覇王)을 역설한 관중

유장한 중국의 역사 속에서 명멸한 명재상으로서 제2인자는 수두룩하다. 저우언라이는 홀로 돌출한 것이 아니라 그 전통속에서  현대 중국의 제2인자로 부상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도움이 될 몇 명을 추려보고자 한다. 
  춘추전국시대에서 중국사의 제2인자의 전통을 세운 이는 기원전 685년으로부터 기원전 645년까지 40년에 걸쳐 제(濟)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패권을 잡도록 한 관중(管仲)이다. 관중은 원래 환공 형의 스승이었고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경쟁자인 환공을 활로 쏘아 죽이려 했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제 환공은 스승 포숙의 추천으로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했고 이에 그는 환공을 위해 천하를 향해 활을 쏘아 환공의 패업을 성취시켰다. 바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하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배경이다. 
  관중의 위대성은, 첫째로 그가 기원전 7세기에 이미 귀족은 물론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국가주권을 확립하려는 혁명적 정치사상을 펼쳤다는 데 있다. 둘째, 그는 벌써 국가사회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예(禮), 의(義), 염(廉), 치(恥) 네 가지 도덕문화의 확립을 제창하고 있다. 셋째, 그는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군신 상하 귀족 천민이 모두 법을 지키는 것」을 크게 다스리는 것(大治)이라고 규정한다. 더구나 그는 『왕의 욕망 때문에 법령을 고쳐서는 안 되는데 법령은 왕보다도 존귀하고 백성보다도 귀중하다』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상벌을 바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법치(法治)를 뜻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량치차오(梁啓超)가 그의 저서 『관자전(管子傳)』에서 『법치는 다스림(治)의 가장 옳은 제도이고, 세계 5대주, 수천년의 역사에서 이 법치주의를 가장 먼저 들고 나왔고 체계 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관자다』라고 단언한 것은 그의 사상의 핵심을 찌르고 법사상사에서 그의 지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그의 사상의 큰 특징은 국가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백성들을 가멸게 만들고 나서 정치를 한다고 확인하는 경제사상에 있다. 그는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까닭을 생산부진, 권력층의 착취, 토족의 겸병, 사치, 낭비, 금융유통의 정체, 재물 유출 등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의 경제정책은 농업의 생산진흥, 소금, 철 등 주요 물자의 생산관리, 국가재정의 절약, 산업의 발전, 유통물가의 조절, 분배의 균형, 그리고 세제(稅制) 확립과 병부(兵賦)의 조절을 꼽고 있다. 
  다섯째, 그의 사회정책의 특징은 그가 백성들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으로 나눈 선구자라는 데 있다. 넷으로 분류된 백성들을 대대로 자신의 직업을 바꾸지 않고 일을 익히게 함으로써 그들을 스스로 안락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로 따지자면 국민에게 원초적 계급 제한을 가한 것이지만, 산업과 대중교육이 발전하지 못한 당시로서는 대중들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혁명적 방법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여섯째, 그의 군사사상은 군사력의 양적 측면보다 질적 측면을 중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수효가 많은 것보다는 「정예」 군사가 필요하며, 물리적 힘보다 「정신적 힘」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틀어 관중사상의 이상은 백성과 혼연일체가 될 만치 민심을 얻고 그들의 자발적 지지 위에 덕치(德治)를 폄으로써 천하를 바르게 다스린다(正天下)는 데 있다.  그는 무력으로 천하를 누르는 것을 패자(覇者)라 하고, 덕(德)으로써 천하를 얻는 것을 왕자(王者)라고 구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문과 무를 겸비하는 것이 덕(文武具備, 德也)』이라는 전제 아래 무(武)에 치우친 패자(覇者)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패왕」을 정천하(正天下)의 주인공으로 규정한 것이다.    관중의 사상은 모든 분야 심지어 형벌, 속형(贖刑), 복제(服制)에까지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고 오늘날에도 전범이 될 만하다. 『논어』에서 관중을 최고로 평가하고 있는 공자도,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구별한 것으로 보아 관중의 제자였던 것이다.  아마도 광막한 중국의 역사에서 관중의 사상적 맥을 잇고 제2인자적 전통을 세워나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꼽는다면 오직 제갈량 공명(諸葛亮 孔明)이 있을 뿐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이미 20대의 젊은 시절에 스스로 자신을 춘추전국시대에서 문인(文人)의 최고봉인 관중과 무인(武人)의 최고봉인 악의(樂毅)에 비교한 것은 관중의 사상에 깊이 통달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오죽하면 당대의 명사들이 한결같이 그를 와룡(臥龍)이라고 불렀겠는가. 
『삼국지』에서 전략론의 압권은 공명이 유비(劉備)와 만나 펼친, 천하를 3분한 뒤 패업을 성취한다는 웅대한 삼국정족론(三國鼎足論)이다. 또한 삼국지에서 전략가들의 이론투쟁의 백미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즈음하여 항복론자들인 손권의 이름있는 전략가 모두와 펼치는 공명의 토론 대목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통령선거 때 각 진영의 정책참모들이 총출동한 TV토론이라고 할까. 여기에서 공명은 동서고금에 통달한 그의 박학한 지식과 천하대세를 꿰뚫어보는 전략적 시야로 손권의 전략가들을 압도한다. 나아가 『삼국지』 전쟁론의 압권인 적벽대전의 전과정에서 언제나 공명에게 뒤진 주유가 오죽하면 『하늘이 나를 내셨으면서 어찌 공명을 내셨나이까(旣生瑜하고 何生亮고)』 탄식하며 죽은 것은 공명이 「천하기재」임을 알려주는 결정적 증언이다. 

2인자의 최고봉 제갈공명


여기에서 『삼국지』를 통해 공명을 더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삼국지』를 통달한 사람이라도 지나치기 쉬운 세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의 진면목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공명은 관중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법치주의와 덕치주의를 실천했다. 유비가 서천(蜀)을 차지한 후 법정(法正)이 한고조(漢高祖)의 약법(略法) 3장(章)을 예로 들어 형벌의 완화를 권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명은 유언(劉焉), 유장(劉璋) 부자의 멸망이 형벌의 이완, 덕정(德政)의 부재에 있음을 직시하고 법치로써 군민상하의 기강을 세운다. 
  그리고 그는 전쟁피해를 본 백성들에게 논과 밭 그리고 집과 재산을 돌보도록 보호하여 민심을 얻고 현지의 인물들을 대거 발탁함으로써 기득권층을 포섭하는 정책을 과감히 편다. 기원 1세기 초 촉의 지배권을 쥔 적이 있던 공손술(公孫述)의 부하 이태(李態)의 기록에 따르면, 촉에서는 농업과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수산물과 지하자원 등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그곳에는 기원전부터 호족(豪族)이 전횡했으며 유장 부자의 실패도 그들을 다스리지 못한 데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법치(法治)와 덕정(德政)으로써, 서기 214년 촉을 차지한 지 5년 뒤 유비를 한중왕(漢中王)에, 7년 만에 촉의 황제에 오르게 할 만큼 누구도 제압해내지 못했던 촉의 호족들을 포섭했던 것이다. 
  둘째, 그는 신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의 원조이다. 그는 남만(南蠻)의 지배자 맹획(孟獲)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 일곱 번 놓아주는 칠금칠종(七擒七縱)의 고사성어를 낳으면서 그들 야만족의 마음을 사로잡아 후환을 없앤 것이다.  이것은 군사적 지배가 아니라 문화적 정복을 뼈대로 하는, 구중국의 다른 나라 왕에 대한 책봉·조공체제와 세계에서 가장 나은 신중국 소수민족정책의 원류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마오쩌둥은 『삼국지』에 통달한 공명의 제자인 것이다. 
  셋째, 그는 물산을 장려하고 상업을 발달시켰으며 촉의 비옥한 땅을 개간하고 개발하는 것을 토대로 남만을 정벌함으로써 중국의 영토를 오늘날 윈난성(雲南省) 등 남방 오지로까지 확장하고 개척했다. 공명은 열과 성을 다하여 유비를 도움으로써 광활한 중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제1인자와 제2인자의 철저한 결합을 의미하는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낳고 제2인자의 전형과 전통을 세운 것이다. 

당태종의 명재상 위징 

  관중, 제갈공명의 맥을 이어 중국사에서 제2인자의 전통을 계승한 특출한 인물의 하나가 위징(魏徵)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징은 당(唐)의 창업에 일등공신인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수성(守成)에도 성공하도록 도운 명재상이다. 영걸이었던 당태종의 시대(서기 627~649)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하여 중국사에서 길이 추앙되는 황금시대이고 위징은 그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중국사에서 『논어』 『맹자』 『춘추좌전』 『서경』 『자치통감』과 더불어 제왕학(帝王學)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바로 당태종과 위징의 치국문답(治國問答)이다. 고구려 원정에 패배한 당태종이 위징이 살았다면 원정을 말렸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무덤을 다시 돌보고 유족을 후대한 것만 보아도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당태종시대에는 무엇보다 과거제도가 유능한 인재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그러나 전통 명문과 한미한 집안(寒門), 그리고 서족(庶族)까지 포함하여 신구세력의 조화 속에 능력 위주로 새로운 인재들을 충원한 것은 강조할 만하다. 
  위징도 태종과 왕권을 다툰 태종의 형 이건성(李建成)의 전략가로서 태종을 죽여야 한다던 인물이었으나 추후 태종에게 발탁된 것이다. 당태종의 시대에는 중앙관제, 토지제도, 세금제도, 병제 등이 637년 율령격식(律令格式)으로 정비되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완성되었고 그 중심에 위징이 서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시된 것은 강력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완성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중국을 천하의 중심에 놓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국제적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토대는 중국의 강력한 경제력과 정치·문화·군사력에 기초한다. 그것은 기원전 2세기에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 2천년의 역사를 갖지만, 그 토대는 한무제(漢武帝)시대에 다져지고 당태종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위징은 중화체제라는 동아시아의 중국패권체제(Pax Chinica)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역량있는 건설자였고, 유장한 중국사에서 명재상으로서 제2인자의 역사적 전통을 잇게 한 중간다리이다. 

유럽사에서 제2인자의 역사적 좌표를 갖는 인물 가운데 중국사의 인물들과 비교할 만한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로마사에서 두드러진 제2인자는 먼저 카이사르 시대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30)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일관하여 제2인자의 자리에 만족하지도 못했고 자질과 역량도 없이 제1인자를 다투다가 악티움해전(기원전 31)에서 패배하여 자살한 인물이다. 

  오직 그는 두 가지 족적만 남기고 있다. 중국에서 절세 미인으로 여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비견할 만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나오는 연설문이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는 유명한 「공화주의자의 연설」을 한다. 『… 왜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는가 하고 힐문한다면 이것이 나의 대답입니다. 내가 카이사르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브루투스에게 설득된 시민들의 마음을 안토니우스는 단숨에 돌려버린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카 야심가였다고 합니다. 브루투스는 참으로 인격이 높으신 분입니다. 카이사르는 많은 포로를 로마로 잡아왔습니다. 그 배상금은 전부 국고에 넣었습니다. … 빈민들이 굶주려 울부짖으면 카이사르도 같이 울었습니다. … 여러분은 루페르칼 제일(祭日)에 내가 그에게 세 번 왕관을 바쳤고 그는 세 번 다 그것을 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야심입니까! …』 
  그는 다만 두 가지의 영예만 차지하고 있다. 그가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의 제2인자였다는 점이 그 하나이다. 카이사르는 인류사에 우뚝한 정복자의 하나지만, 정복된 지역을 정치적으로 포용하고 문화적으로 동화시키는 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거대한 로마제국의 참다운 창건자이다. 독일제국의 카이저(Kaiser)와 러시아 제국의 차르(tsar) 모두 카이사르(Caesar)로부터 나온 것만 보아도 카이사르의 위대한 이름과 그의 시대에 제2인자였다는 사실이 영예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옥타비아누스와 제1인자 지위를 놓고 대결했다는 점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죽었을 때 18세였고 몸은 병약했고 정치적으로는 열세였다. 그러나 그는 정적들과의 참혹한 대결에서 이긴 정치적 역량과 로마제국의 황금시대를 열어 2백년 동안 팍스 로마나(Pax Romana)시대를 마련한 문화적 역량 때문에 카이사르보다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로마제국에 수없이 많은 도로망을 건설함으로써 거대한 로마제국의 통일성을 다지면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낳게 한 그에게 기원전 27년 로마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준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는 축복받은 로마문명의 참다운 건설자이며 그 문명을 통해 인류사에 오랫동안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류의 최대 걸작품 그 자체이다. 안토니우스는 위대한 아우구스투스와 대결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오직 하나의 이유로 오늘날까지도 세계사에 기록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통일재상」 비스마르크

유럽사에서 명재상이며 부동의 제2인자로 부각되는 인물로서 청년시절 28번이나 결투할 만큼 다혈질이었던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를 뺄 수 없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위대한 프러시아인이었고, 괴테와 베토벤 그리고 칸트와 헤겔 등은 위대한 세계인이었으나, 그는 「최초의 위대한 독일인」으로 일컬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862년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가 그를 재상으로 임명한 뒤 그의 생애는 크게 두시기로 나뉜다. 첫째, 냉혹한 「철혈(鐵血)재상」의 시기이고 동시에 활화산 같은 「통일재상」의 시기이다. 재상 취임 후 1871년까지 이 10년 동안 그는 일관하여 「현상타파 노선」에 따르는 철저한 통일주의자였고 광적인 전쟁주의자였다. 
  그는 의회에서 『오늘의 문제는 여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된다』는 악명 높은 첫 연설을 하고 나서 세 가지의 전략적 초점에 맞추어 통일의 역사적 사업을 준비한다. 하나는 독일통일 노선이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독일주의를 부정하고 열강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소독일주의 통일노선을 확고히 정립한다. 또 하나는 독일통일의 방법이다. 그는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반영하는 자유주의적·혁명적 통일의 길을 부정하고 프러시아의 군사력을 통한 무력통일의 길을 채택했다. 나머지 하나는 통일전쟁을 위한 외교노선이다. 그는 세 차례의 통일전쟁에 앞서 관계열강의 중립을 보장받는 외교에 성공했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통일전쟁외교의 승리는 군사력에서 열강이 프러시아를 과소평가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과대평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에서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은 그의 전략적 판단의 정확성과 열강의 전략적 오판의 복합적 산물이다. 우선 1864년 덴마크군을 단숨에 무찌르고 1866년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쟁은 7주 만에, 1870년 에밀 졸라의 소설 『전멸』에서 처절하게 묘사될 만큼 참패한 프랑스와의 전쟁이 2개월 만에 끝난 것은 그 필연적 결과이다. 그 결과 1871년 1월18일 베르사유 궁에서 프러시아 왕이 독일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면서 유럽대륙에서 강력한 통일독일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재상 제2기는 「독일통일」을 위한 「현상타파」의 제1기와는 반대로 「통일독일」의 내부통합을 위한 「채찍과 당근 재상」의 시기이고, 「통일독일」의 안정적 「현상유지」를 위한 「평화재상」의 시기이다. 그는 1890년 물러날 때까지 20년을, 심지어 식민지 쟁탈전까지 조심하는 반전(反戰)주의자로 일관한다. 그는 마르크화, 금본위제도, 미터법의 확립, 제국은행 설립 등을 통해 국내시장을 통일했다. 자원이 풍부한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전리품으로 획득하고 5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프랑스의 전쟁배상금을 이용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전개, 독일의 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독일자본주의 발달의 필연적 산물로서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정당이 세력을 형성하자 1878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만들어 냉혹하게 채찍을 들고 그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그러나 1884년 사회민주당의 의회진출이 활발해지자 이 현실을 직시하고 능동적으로 「당근정책」을 폈다. 세계 최초이며 오늘날 복지국가 사회정책의 원형으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사회정책이 1883~1899년에 실천된 것은 비스마르크의 업적에 속한다. 
  한편, 그의 현상유지 외교전략의 기본목표는 프랑스의 고립이고, 그 기본구조는 첫째,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동맹인데 이것은 프랑스에 총구를 겨누는 것이다. 둘째, 유럽에서 공격적 침략을 포기해 유럽의 세력균형을 깨지 않는 것이다.  셋째, 해외식민지 쟁탈전 불참으로, 이것은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다. 1873년 「삼제동맹(三帝同盟)」과 1882년 「3국동맹」을 두 축으로 하는 일련의 비밀동맹조약은 외교사에 「비스마르크 체제」로 특기될 만큼 모두 통일독일의 안전을 보장한 비스마르크 외교전략의 걸작품이다. 
  그가 독일을 통일한 지 47년 만에, 그가 재상에서 물러난 지 28년 만에 통일독일이 선포된 베르사유궁의 바로 같은 방에서 독일제국이 붕괴된 것은 통렬한 역사적 반어(反語)인 동시에 평화주의자 비스마르크의 위대성을 입증한 강렬한 역사적 증언이라 할 것이다. 유럽 세력균형의 전통에서, 춘추전국시대에 비유하자면, 통일독일은 유럽의 새로운 「패권국가」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패권국가 독일의 등장은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입증되듯 한결 강화되고 위험한 역사적 반동과 침략, 세계적 분열과 전쟁의 새로운 진원지가 출현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매 영국의 「민주적 의회정치」, 프랑스의 「혁명적 공화정치」에 맞서는 「군국주의적 황제정치」의 뿌리를 깊게 심은 탓임은 분명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독일통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과정에서 어떤 전쟁도 없는 평화의 건설자였고 오늘날 20세기 말 기적 같은 제2차 독일통일의 원형을 창출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한국사의 2인자들


그러면 우리 민족사에서 동서고금의 걸출한 「제2인자」에 맞먹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 풀어야 할 화두가 개혁과 통일이라면 김유신과 정도전은 우리 역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제2인자들이다.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민족사의 전개과정에서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전형을 창출한 인물의 하나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해 부동의 제2인자였다. 그의 활약상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물론, 수많은 민간의 구전설화로도 전해 내려오며 심지어는 민간과 무속에서 장군신(將軍神)의 하나로 추앙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역사적 지위는 결코 쉽사리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네 단계를 밟아 명장, 명상(名相)으로서 제2인자의 전통을 세우며 민족통일의 영웅으로 부상한 것이다. 
  첫째,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장군의 최고 반열에 오른 단계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金官加耶)의 왕족으로 진골귀족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왕족과 통혼할 수 없는 신분적 제약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신라 토착귀족들 틈새에서 그는 자신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큰 공로를 세워 인정받아야만 했다. 15세 때 화랑 수련을 시작한 그는 34세 때인 서기 629년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공격에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신라 최고의 장군이 될 기틀을 마련했다. 
  둘째, 그가 국내 개혁의 주체세력을 형성한 단계이다. 당시 신라의 사회·정치적 조건은 이중적 과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나는 귀족연합의 지배체제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의 전환이다. 이 점은 크게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에 요구되는 역사적 추세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삼국쟁투의 역사적 현실에서 국가존립과 발전에 직결되는 과제이기도 했다. 
  하나는 성골(聖骨) 출신에 마땅한 남자가 없다는 오직 하나의 이유로 선덕·진덕 두 여왕이 등장한 데서 나타나듯, 성골 출신 왕과 기득권에 집착하는 토착귀족세력이 규정하는 지배세력의 협소성과 수구성을 극복함으로써 신라 내부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개혁적 문제이다. 이 두 가지는 결국 변화와 개혁을 반대하는 수구적 토착 구귀족세력과 새롭게 부상하는 개혁적 신귀족세력의 권력투쟁 문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시기에 김유신의 주도로 그의 누이동생과 김춘추, 그리고 김춘추의 셋째딸과 김유신이 결혼한 것은 중대한 역사적 함의가 있다. 그 두 결혼 자체가 왕족과의 통혼문제에서 신분적 제약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지배세력의 신진대사를 촉진했기에 개혁적 본질을 갖는다 
  그것은 또한 수구적 귀족연합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계인 까닭에 미약한 김춘추 세력과 투항한 금관가야계인 까닭에 소외돼온 김유신 세력의 정치·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 결합은 새로운 역사적 추세에 따라 수구세력과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세력이 형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셋째,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을 형성한 단계이다. 당시 신라가 삼국 충돌의 현장에서 주도권을 확립하지 못한 역사적 한계조건에서 그가 서기 647년 비담(毗曇) 등 구귀족세력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결정적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반란진압을 통해 구귀족세력이 몰락하고 그가 대표하는 이른바 「신김씨」 중심의 새로운 귀족세력이 실권을 장악한 점이 그 하나이다. 그 결과 성골 출신 왕의 시대가 끝나고 그의 힘에 의지해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이 됨으로써, 귀족연합에 의존해온 신라의 상대(上代)시대가 끝나고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확립되는 중대(中代)시대가 열린 점이 또하나이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변화는 그 두 가지 점에 기반을 두고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형성된 사실이다. 

민족통일의 영웅 김유신

김춘추는 진흥왕, 문무왕과 더불어 신라 3대 왕으로 일컬어지지만, 신라시대의 왕 가운데 최고의 영걸이다. 그는 삼국쟁패의 시대에는 열악했던 신라의 위치를, 삼국통일로써 근본적으로 재정립한 까닭이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고구려와 일본 그리고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국제연합을 구축하기 위한 외교적 활동을 벌여온 경력이 있었으나, 왕권을 장악하고 김유신을 신라의 최고 수뇌인 상대등(上代等)에 임명함으로써 방해세력 없이 삼국통일의 역정을 밟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결합은 신라와 가야의 실질적 통일이라는 차원을 넘어 삼국시대에 최초로 나타난 탁월한 통일구상과 의지의 출현이고 나아가 민족사의 무대에서 최초로 형성된 통일주체세력의 등장을 뜻하는 것이다. 
  넷째, 당나라와 투쟁해 통일신라의 강토를 지킴으로써 민족사에서 그의 지위를 결정적으로 규정한 단계이다. 그는 660년 백제원정 당시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때맞게 합류하지 못한 신라장군을 참수함으로써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는 기도를 단호한 의지로 꺾었다. 나아가 그는 그들이 백제지역의 분봉(分封)을 제의하여 신라 지배세력의 분열을 꾀했을 때 그 유혹을 거부하여 신라 지배세력의 결속을 굳혔다. 668년 고구려가 무너지고 당나라가 신라마저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그는 8년에 걸친 나·당전쟁의 전과정에서 통일신라의 강토를 지킨 대들보였던 것이다. 
  그에 대해 김춘추와 마찬가지로, 외세를 업고 고구려의 넓은 강토를 축소시켜 삼국통일을 달성했기 때문에 외세의존적 사대주의자로 보는 평가가 있다. 그것은 일리 있는 얘기다. 그러나 그 당시는 민족이 형성되기 전이었고 투쟁하는 삼국에는 오직 승리만이 목표였음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8년에 걸친 나·당전쟁의 과정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과 신라인이 합세하여 외세를 물리침으로써 민족의식의 싹이 돋아난 것은 마치 고려시대에 몽고와의 항쟁과정에서 민족의식이 한결 높아진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의 삼국통일은 민족형성의 제1단계인 동시에 제1차 민족통일인 것이며, 고려의 제2차 민족통일을 거쳐 오늘날 이룩해야 할 제3차 민족통일의 원형을 창출한 것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마디로 압축하여 그는 철기문명의 세례를 가장 늦게 받은 후진 신라를 통일의 주체로 이끈 명장과 명상으로서 제2인자의 전통을 세운 민족통일의 영웅인 것이다. 

최고의 2인자 정도전

우리 민족 5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제2인자이자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제2인자 역할을 뛰어나게 수행한 사람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제2인자지만 실제로는 조선 건국의 아버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도전은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제국(漢帝國)을 창건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장량(張良)의 관계에 비교한 적이 있었다. 조선이나 한(漢)이나 무력을 갖춘 제1인자와 전략을 갖춘 제2인자가 연합하여 통일된 새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비교는 정당하다. 
  그러나 제1인자와 제2인자의 인간적 관계를 볼 때, 이성계와 정도전의 관계는 오히려 촉한을 건국한 유비와 제갈공명의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교될 수 있다. 이성계는 정도전에 대해 어떤 모함이 있더라도 그를 신뢰했으며, 그에 대한 비판세력을 제거했다. 문덕곡(文德曲) 등 많은 가사에 나타나 있듯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조선 건국의 모든 영광을 돌렸고 그의 신뢰에 온몸과 마음을 다해 보답했다. 정도전이 활동한 시대는 중국에서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기, 고려가 내우외환이라는 크나큰 역사적 도전에 직면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대륙으로부터는 홍건적 및 원(元) 잔당의 침략으로, 해양으로부터는 왜구의 노략으로 국토가 유린되었다. 
  안으로는 친원배명(親元排明)의 권문세족들에 의해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고 농민들은 수탈당했다. 공민왕 이래의 역대 왕들은 일시적으로 개혁정치를 시도했지만 결국 통제 불능의 사욕과 방종으로 귀결되었고, 수구적 집단이 정국을 요리했다. 이러한 난세에 한편으로는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왕도정치의 이상으로 무장한 일군의 젊고 유능한 개혁세력이 등장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적을 무찌르는 과정에서 애국적이고 진취적이며 강력한 무장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1383년 함흥으로 찾아간 41세의 정도전과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48세의 이성계의 만남은 이 두 세력의 물리적 역량과 사상적 역량의 역사적인 결합이다.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비전을 제시하고 정권과 병권을 동시에 장악함으로써 건국의 큰 틀을 세웠다. 모든 분야에 걸친 그의 사상은 참으로 혁명적 특징이 있다. 

  정도전의 위대성은 첫째, 그의 이상이 혁명적 민본(民本)세계를 지향하는 데 있다. 조선헌법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기조가 바로 그것이다.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민이 인군(人君)에게 복종하고 인군을 버리는 데는 털끝만큼의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인(仁)으로서만 해야 한다』 그것은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를 뼈대로 하고 형벌을 보조수단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결코 뒤지지 않는 민본주의이고 인간의 완성과 공론(公論)과 공의(公議)가 이루어지는 왕도정치이며, 절대적 지배와 절대적 복종을 부정하는 혁명적 사상이다. 그것은 당태종에게 백성과 왕의 관계를 『물은 배를 띄우지만 그것을 뒤집기도 한다』고 수없이 강조한 위징의 정치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둘째, 삼봉 경제사상의 탁월성은 민본주의를 토대로 국력과 민력(民力)을 통일시키는 데 있다. 그는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하여 수구적 귀족세력의 대토지 소유를 혁파하는 토지개혁과 농업생산력의 증대,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자작농의 확대 창출에 치열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공전제(公田制)와 10분의 1 세제의 확립, 상(商)·공(工)·소금·광산·산장(山場)·수과 등의 국가경영을 주장하는 그의 경제정책은 오늘날로 치자면, 국민의 경제적 평등에 기초한 경제의 구조조정인 셈이다. 
셋째, 그의 정치사상이다. 그는 지방토호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중앙집권제를 구상하고 군현제도를 정비하며 관리의 엄격한 선발을 강조하고 왕을 그 중심에 둔다. 그러나 그는 『임금이 신하만 못하면 신하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이 좋다』는 총재론(催宰論), 곧 유능하고 강직한 사람이 국정을 맡는 재상중심체제를 주창하고 있다. 재상을 중심으로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능력 위주의 합리적 관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권력이 백성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정치체제구상은 군주권(君主權)을 제한하는 탁월한 비전으로 조선정치체제의 근저를 형성하게 된다. 

  넷째, 그의 사회사상이다. 그 특징의 하나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士)를 지배층으로 인정했으나 사는 고정된 세습신분이 아니라 자질이 뛰어나고 누구나 교육을 받으면 여기에 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계층은 도덕가, 철학자, 교육자, 역사가 그리고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지사라야 한다.  심지어 그들은 천문, 의학, 지리 등 실용적 기술학문을 익혀야 하고 나아가 무인(武人)이 되어야 하며 농업도 겸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적서(嫡庶), 양천(良賤) 등 혈통에 따른 신분차별을 전혀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국력의 인적 조건을 극대화하려는 점이다. 그는 암묵적으로 사회적 평등주의를 주장하여 정치적 충원 조건을 확대한 것이다.


다섯째, 군사사상의 본질적 특징은 병농일치의 국방체제와 왕족이나 귀족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중앙군의 강화에 초점을 둔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병서를 짓고 진법(陣法) 훈련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그는 경제력 제고를 통해 군사력의 물질적 기초를 다지고 근대적 상비군제도를 지향함으로써 자주국방체제를 갖추려고 한, 부국강병정책의 투철한 실천자이다.



광개토대왕의 후예

마지막으로 그의 자주사상과 고구려 영토회복노선이다. 그는 고려시대와 조선 후기에 나타나듯 중화사상의 문화적 지배에 굴종하지 않고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실용적 노선을 취하면서도 일관하여 자주노선을 지키고 있다.

그의 병서집필과 진법훈련은 자주국방을 위한 것은 물론이지만, 사실상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광활한 영토를 되찾으려는 요동공략에 역점을 두었다. 그는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중국이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음을 꿰뚫고 있었고 이 점에서 그는 참으로 고구려 옛 강토 회복을 시도한 광개토대왕의 가장 강력한 후예였다고 할 것이다.


정도전이 조선 건국을 얼마나 열심히 준비한 사람이었는지는 그가 건국자로서, 재상으로서 가장 바쁜 기간이었던 1392년의 태조 원년에서 1398년에 죽을 때까지 지은 수많은 저술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1392년에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와 『강무도(講武圖)』라는 병서, 1393년에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등의 악사(樂詞), 1394년에 일종의 헌법초안인 『조선경국전』과 『심난기(心難氣)』 등의 철학서, 1395년에 『고려사』, 1397년에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1398년에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을 지어 엄청난 열정과 초인적인 능력을 뿜어냈다. 이러한 저작은 모두가 조선 6백년의 기틀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도전은 30년간 조선 건국을 준비했고, 위화도회군 뒤 10년간 그가 준비한 모든 것을 실행에 옮겼다. 정도전은 고려 말의 참담한 위기 속에서 9년 동안의 유배·유랑생활 속에서 직접 체험한 백성의 간절한 꿈을 자신의 꿈으로 만든 위대한 정치가요 사상가였다.

명태조 주원장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정도전이 재상중심론, 사병혁파론에 위협을 느낀 요동정벌 반대론자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해 더이상 민족사의 지평을 개척하지 못한 것은 비통한 일이다.


제 환공과 관중, 당 태종과 위징,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원래 적대적 위치에 있었으나 역사적 포용력을 발휘한 제1인자와 역사적 비전과 실천력을 갖춘 제2인자의 역사적 좌표를 지켜 그들의 조국을 빛나게 한 것은 분명하다. 이에 비해 이방원이 정도전을 포용하지 못한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손실일 뿐만 아니라 포용력 있는 제1인자와 탁월한 제2인자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전통을 세우지 못한 치명적 선례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호방한 성격과 혁명가의 기질을 타고난 데다가 문무를 겸비함으로써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사상가였고, 웅대한 전략가였다.

그는 장구한 세월 동안 척박하기 짝이 없는 민족정치사의 전개과정에서 비교를 불허하는 뛰어난 경세가, 넓은 시야를 가진 전략가, 역사적 신진대사를 실현한 혁명가, 유일하게 성공한 개혁 정치가로서 빛나는 제2인자의 전통을 세우면서 불멸의 족적을 남긴 것이다.(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