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다수가 적폐청산을 원하고 있다. 청산범위는 과거 10년 동안 자행된 국기문란 사건이다.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 촛불이 만든 정부는 박근혜 다음정부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 위의 시대정부다. 산업화·민주화시대에 잉태된 관행들이 시스템·가치·문화의 오작동에 관여한 지 오래다. 낡은 관행은 고용주와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중소기업과 대기업,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수도권과 지방,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뒤에 숨어서 조금씩 몸집을 불렸다. 이러한 다층적이고 전방위적인 갈등을 균열구조로 고착시키는 접착제 역할을 해 왔다. 적폐는 취업면접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던 고졸청년,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업을 포기한 형제, 맞벌이 부모의 늦은 귀가로 해가 저물어도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져 기약 없이 월급날만 바라보고 사는 지하단칸방 가족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압축성장의 명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은 공정한 기회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 최소한의 주거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 자라나는 꿈나무의 미래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국가, 중소기업의 아픔을 외면하는 국가가 되었다. 없는 자가 죄인이 되는 세상, 정직하게 사는 자가 손해를 보는 세상,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것이 많아야 성공하는 세상, 이런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새로운 규칙을 정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는 물론이고 기업, 언론, 종교, 노조, 학계, 시민단체 모두가 적폐를 생산하고 소비했다. 적폐는 어떻게 광범위한 동맹을 맺고, 공공성약화와 소득양극화를 배설하며 생존할 수 있었을까. 진영논리와 이념대립 그리고 권위주의가 적폐와 공생을 도모했다. 적폐의 근원 중 하나가 정치무관심이다. 낡은 관행이 쌓이고 국기문란 사건이 터지는데, 정치무관심은 좋은 그늘이 되고 자양분이 되었다. 누군가 6개월 또는 1~2년 후 적폐청산이 완성되었다고 선언한다면, 동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2가지다.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회적 합의 방식, 즉 사람들의 핏빛 절규와 국가적 참화를 거친 후, 통제 가능하지 않은 수많은 변수들을 끌어안고 어쩔 수 없이 사회적 합의로 끌려가는 길. 또 하나의 길은 우리 스스로가 성찰적 자세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사회적 합의를 시도하는 길이다.
적폐는 증명하기도 어렵고, 때론 법의 잣대도 피해가는 초법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다. 과거 정부의 국기문란 사건이 법적종결을 맞더라도, 적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도를 바꾸어도 적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5년 국민통합과 화해증진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었고, 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했다. 파시즘적 인종 살해의 과거청산을 위해 가해자가 공개적으로 진실을 밝히는 대신 이들을 사면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우리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있었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누가, 어떤 권위와 방식으로 적폐를 규정하고 해소할 것이며 성과를 평가할 것인가. 어떤 관행들이 한국 사회를 좀먹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국민토론을 시작해 보자. 토론결과를 바탕으로 적폐청산 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특별재판소 설치특별법을 제정하자. 용서를 구하면 그 죗값을 집행유예와 벌금 등으로 대신 묻고, 반복되는 실수엔 작은 죄라도 엄중한 형벌을 약속받자. 적폐청산과 통합정치가 따로 있지 않다. 사회적 합의를 통한 적폐청산은 궁극적으로 통합정치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적폐청산은 정부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관심과 참여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