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핫이슈
이들의 공통점은? ①정보기관장 ②대통령의 측근. 출제자가 의도한 답은 ‘역대 정부에서 대북밀사 또는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인사들’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1월 28일 BBC 회견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적극론을 펴면서 대북 밀사가 주목받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추진사는 바로 밀사의 역사라서다.
이가영 기자
첫 대북밀사 이후락, 김일성 만날 때 그의 손엔 청산가리 캡슐이 …
이후락 방북 후 북한 박성철 부수상 극비 남한행
| 왼쪽부터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2009년 작고),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 [중앙포토] | |
1972년 5월 4일 새벽 1시. 평양 모란봉 초대소에서 잠을 자던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문을 열자 누군가 “옷을 입고 급히 가자”고 했다. 가는 곳은 김일성 주석의 관저. 하지만 이 부장은 도착할 때까지 이를 알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내리자 김 주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주석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부장은 그 손을 잡는 대신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김 주석도 멈칫했다. 잠시 후 손을 꺼낸 이 부장은 김 주석과 악수를 나눴다. 그는 왜 바로 악수를 하지 못했던 걸까.
“그날은 억수같이 비가 내렸어요. 나를 태운 차는 지름길로 가기 위해 비포장 산길을 달렸죠. 저는 여차하면 입에 넣으려고 서울에서 준비해 온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만 김 주석과 악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청산가리 캡슐이 녹아 손에 달라붙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손을 주머니에 넣어 캡슐을 떼고 나서야 악수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전역이 냉전의 그늘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기 힘들었던 1972년. 대한민국 최초의 대북밀사 이후락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가슴에 청산가리를 품고 휴전선을 건넜다던 이후락은 이후 무사히 남으로 돌아왔다. 이 부장의 방북 이후 북한은 박성철 제2 부수상이 극비리에 남한을 찾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다. 이렇게 ‘이후락-박성철’ 라인이 움직인 결과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열매를 맺게 됐다. 북한은 아직도 김일성 주석 시절 7·4 성명에서 밝힌 조국통일 3대 원칙을 통일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서 임수경 지켜본 박철언
|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1994년 6월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고 있다. [중앙포토] | |
그가 처음 대북 특사로 군사분계선을 건넌 건 85년 7월이었다. 당시 남북은 2년 전인 83년 10월 아웅산 폭탄 테러로 인해 일촉즉발의 긴장 상황에 놓여 있었다. 외국 투자와 관광객이 줄고, 안보 부담과 경제 부담이 막중해진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평화 공존 방향으로 가기 위해 서로 밀사를 교환해 대화를 하자는 뜻이 성사됐다. 안기부장 특보로 발령받은 박 전 의원은 85년 7월 북한 수석대표인 한시해와 첫 만남을 갖는다. 이후 그는 노태우 대통령 임기 후반까지 6년 동안 남북회담 수석대표로 북측과 42차례 회담을 했다.
박 전 장관은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자신의 대북 밀사 활동을 소상히 기록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에 대해 “호방하고 가슴이 열린 말투였고, 대인관계에서 아주 활달한 자세였다”고 회고했다. 85년 10월 그의 방북엔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도 함께했다. 당시 장 부장은 김 주석에게 북한이 한 해 전 남한에 수해 물자를 보내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했다. 이때 김 주석은 “받은 것이 더 용감하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박 전 장관의 파트너는 주로 북한 주유엔대사였던 한시해였다. 둘은 ‘88라인’으로 불렸다. 한 전 대사 역시 남한을 수십 차례 드나들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엔 박 전 의원 외에 서동원 안기부장도 대북밀사 역할을 했다.
박지원·임동원·김만복, 정상회담 의제 물밑 조율
대북 밀사의 최대 결과물은 2000년의 1차 남북정상회담, 2007년의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였다.
2000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중국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에서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수차례 만나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박 전 장관에 이어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대북밀사로 같은 해 5월 북한을 찾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났고, 정상회담 의제를 최종 조율했다. 당시 정상회담과 관련한 에피소드. 북한은 김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기념궁전을 방문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김 대통령이 평양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도 이 문제는 결론 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 대통령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임 원장은 “참배 문제를 고집하지 말아달라”는 메시지를 북측에 전했다. 그 결과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임 원장에게 귓속말로 “임 원장이 이겼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은 비공식적인 ‘밀사’ 시대에서 ‘특사’ 시대로 변화돼 추진됐다.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8월 초 두 번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2005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에게 공식 임명장을 받은 최초의 특사였다. 물론 방북의 형식은 비밀이었고, 정보부서 책임자였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는 점에선 앞서의 밀사들과 일치하는 대목도 많다. 이에 앞서 2005년 6월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대북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경색됐던 남북관계와 6자회담의 돌파구를 열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김일성·김정일과 함께 회동
서동권 전 안기부장이 유일
남북 관계 최초의 밀사로는 흔히 고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꼽는다. 하지만 그건 남측 정부의 대북 밀사에 해당하는 기록이고, 이 전 부장보다 10여 년 먼저 남한을 찾은 북측의 밀사가 있었다.
1961년 서울에 나타난 전 북한 무역성 부상(副相, 차관) 황태성이 주인공이다. 1906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황태성은 일제시대 좌익 활동을 했고, 46년 대구 폭동의 주동자였으며, 47년에 월북했다. 그는 대구 폭동 당시 사망한 박정희 대통령의 친형 박상희씨의 친구였다. 북한은 5·16 직후 대남 비방 방송을 일시적으로 중단했고, 황 전 부상을 통해 남북 대화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황 전 부상은 ‘불법 월경죄’로 우리 정부에 체포됐고, 63년 대선이 본격화되면서 사상논쟁의 희생양이 돼 같은 해 12월 사형됐다.
북한을 20여 차례나 방문한 박철언 전 의원도 해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한꺼번에 만나는 일이었다. 서동권 전 안기부장만이 유일하게 김 주석 부자와 회동한 밀사였다.
남북을 통틀어 공인된 최초의 특사는 북한의 김용순 노동당 중앙위 비서였다. 그는 1차 남북 정상회담 석 달 뒤인 2000년 9월 추석 때 송이버섯을 갖고 서울에 오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남북 간 주요 현안을 논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