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당 96정 가지고 있는 미국, 매년 3만명이 총기 사고로 숨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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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홍 기자
개인의 총기 소유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우리나라·중국·일본과 달리 미국·영국 등 많은 국가에서는 일정 요건만 갖추면 총기를 가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사고가 잇따르며 총기 소유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총기 옹호자들은 규제가 개인의 방어 능력을 잃게 해 생명을 위협받게 하고, 국가 예속을 심화시킨다며 규제에 반대한다. 특히 미국은 헌법으로 총기 소유를 인정해 잇따르는 사고에도 총기 소유를 막지 못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총기 소유 규제 강화를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되자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 총기를 사두자며 총기 보유가 늘어날 정도다.
영연방·멕시코·브라질도 구입할 수 있어
미국에서는 18세 이상 성인 중 중범죄 전과자나 불법 이민자, 정신 장애인이 아니라면 총을 구입할 수 있다. 미국은 2001년 일반인 소유 총기가 2억5000만 정이었으나 2007년 2억8000만 정으로 늘어난 걸로 제네바 소재 국제학연구소가 추정했다. 인구 100명당 96정꼴이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매년 3만여 명이 총기 사고로 사망한다. 이 중 자살이 57%, 타살이 40%, 그리고 나머지 3%는 오발 등 부주의에 의한 사고다.
영국·호주·캐나다 등 영연방국가와 멕시코·브라질 등 중남미 등도 총기 소유가 허용된다.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은 총기 등록제를 실시하지만 불법 무기 거래가 활발해 규제가 유명무실하다. 2006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서 유통되는 불법 소형 무기는 6억4000만 정으로 대부분 선진국에서 만들어 아프리카·중동·남미에 팔린다. 멕시코에서는 범죄에 사용된 소형 무기의 80%가 밀수품이라는 기록도 있다. 상비군이 없는 스위스는 21~50세의 남성 대부분이 예비군으로 분류돼 국가에서 총과 실탄을 지급받는다. 이에 따라 총기 보유 가구 비율이 36%에 이르나 총기 사고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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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르는 사고에도 번번히 규제 실패
미국에서는 총기 사고가 빈번하다. 올 11월에는 텍사스주 포트 후드 미군 기지에서 군 정신과 의사가 총기를 난사해 군인 13명이 죽고, 30명이 부상했다. 오바마는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동아시아 순방 일정을 조정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버지니아 공대 학생인 한국계 조승희씨가 교정에서 총기를 난사해 학생과 교수 등 32명이 숨졌다. 99년에는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등학생 두 명이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13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치기도 했다.
총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러나 총을 문화의 일부로 보는 미국인의 인식과 전미총기협회(NRA) 등의 강력한 로비로 번번이 규제에 실패했다. 미 대법원은 2007년 워싱턴DC 등 일부 도시의 총기 소유 규제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NRA는 한 해 150만 달러의 예산을 쓰며 총기 규제를 완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NRA가 2007년 총기 옹호 로비에 쓴 돈은 200만 달러에 이른다. 총기 소유 규제 강화를 위한 총기 규제 옹호단체의 로비자금 6만 달러의 30배를 웃돈다.
총기 소유를 옹호하는 사람들 주장은
첫째, 총기를 보유한 사람의 대부분은 개인의 신변 보호를 이유로 든다. 제3자의 공격에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누군가 총으로 죽이려 한다면 총으로 맞서는 건 합리적인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총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사람은 총기 없이 다니는 사람에 비해 총에 맞거나 다른 방법으로 살해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미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대 찰스 브라나스 교수의 연구 결과, 총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총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4.5배 높았다. 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살해될 가능성도 4.2배 높았다. 자기 방어를 위해 권총을 빼 들었을 경우 총에 맞아 숨질 가능성은 이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의 민권 운동가 고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미국은 총을 사서 아무렇지 않게 발사하기 때문에 폭력과 증오가 인기 있는 오락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비판했다. 킹 목사도 총에 희생됐다.
둘째, 총기 옹호자들은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총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과 독일의 나치 정권, 소련의 스탈린 정권 등 독재정권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총기 소유 규제를 강화했다고 말한다. 실제 소련은 스탈린 정권이 등장한 1929년 총기 소유를 규제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은 과거 바이마르 정권의 총기 규제를 오히려 완화한 것으로 나타나 옹호론자의 주장과 맞지 않다.
셋째, 국토 방어를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스위스 등은 국민 개개인이 예비군 역할을 해 전쟁이 났을 때 참여할 수 있도록 가정에 총기를 보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위스는 총을 집 밖으로 반출하는 건 엄격히 제한해 총기 사고는 낮은 편이다. 그러나 상비군이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적용하기 힘든 주장이다.
독립전쟁부터 이어진 미국의 총기 문화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총기를 미국의 문화유산으로 봤다. 18세기 독립전쟁 이후 미국인의 정신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영국 식민지 지배에 반기를 든 미국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해 독립전쟁에 나섰다. 총기 보유는 독립전쟁부터 이어진 셈이다. 미국은 개척자들이 세운 나라다. 개척자들은 인디언과 야생동물·외국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지녔다. 이들은 정규군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예산이나 인력이 없는 상태에서 무장한 개개인이 군인의 역할을 하는 시민군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개인주의는 현대 미국인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총기 소유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절반 이상이 총기 소유를 지지한다. 총기를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본 것이다. “총기 소유를 규제하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반수가 반대한다. 총기 논란은 지역과 지지 정당에 따라 갈린다. 뉴욕·워싱턴 등 동부와 캘리포니아 등 서부 해안 지역은 총기 소유 규제를 지지하는 반면, 텍사스·플로리다·조지아 등 남부와 몬태나 등 북서부는 총기 옹호 분위기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총기 규제 강화를 원하나 공화당은 반대한다.
총은 대중문화에서 권력과 남성성의 상징으로 영웅 또는 악당과 함께 등장했다. 할리우드에서는 ‘대열차 강도’나 ‘더티 해리’ 시리즈, 존 웨인 주연 서부극 등 카우보이와 총잡이가 등장하는 영화를 대량 제작했다. ‘대부’ ‘스카페이스’ 등 조직 범죄 이야기도 할리우드가 즐겨 다루는 소재다.
링컨·케네디·간디 … 역사 뒤흔든 탕…탕…탕…
| 프랑스 사진 작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간디의 암살 직전 모습. [중앙포토] | |
1914년 6월 28일 발생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암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시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합병을 요구하며 이 지역을 순방 중인 황태자를 암살했다. 세르비아를 제재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독일과 오토만 제국을 끌어들이자 영국·프랑스·러시아가 견제에 나서며 충돌, 150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났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엄청난 배상금에 시달리다 군국주의로 치달아 일본·이탈리아와 손잡고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하게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끝나가는 1865년 4월 14일 워싱턴 포드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중 남부연맹 지지자인 존 부스의 총탄에 쓰러졌다. 링컨은 흑인 노예 문제로 미국이 남·북으로 갈릴 위험에 처하자 전쟁을 통해 분열 위기의 나라를 구해 제2의 건국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흑인 노예제는 건국 이후 미국을 괴롭힌 고질병이었기 때문이다. 링컨과 함께 존 F 케네디, 제임스 가필드, 윌리엄 매킨리 등 역대 4명의 미 대통령이 총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케네디는 암살 이유가 불투명해 기득권 세력의 음모설이 나돌기도 했다. 링컨 사후 1세기가 지나 흑·백 평등을 부르짖은 마틴 루서 킹 목사도 1968년 4월 4일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상습 전과자인 제임스 레이에게 피살됐다.
아시아에서도 국가 지도자 암살 사건이 적지 않다. 인도의 국부로 추앙받는 비폭력 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뉴델리 거리에서 급진 힌두주의자 나투람 고드세에게 피살된다. 간디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슬람 세력은 결국 힌두교가 대다수인 인도에서 독립해 1956년 3월 26일 파키스탄을 세웠다. 한국에서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올해는 안 의사의 의거 100주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