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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50> 국정조사 [중앙일보]

ngo2002 2010. 5. 29. 14:21

2009.11.09 00:37 입력 / 2009.11.09 00: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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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권을 달구고 있는 핫이슈는 세종시 계획 수정 문제와 4대 강 살리기 사업입니다.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는 “4대 강 사업의 국정조사와 내년도 예산 심의를 연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4대 강 사업의 국정조사안이 국회를 통과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국정조사라는 용어 자체가 갖는 정치적 폭발력은 작지 않습니다. 우리 정치사에서 국정조사가 정국의 흐름이나 여론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국정조사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이뤄지는지 짚어 보겠습니다.

허진 기자

5공비리·한보사건·옷 로비 … 역사의 고비마다 여론 흔드는 뇌관 구실

지난 5월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명의 초선 의원에서 국민적 스타로 발돋움한 건 1988년의 5공 청문회에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 비리를 다뤘던 국정조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 등 5공의 실력자들이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왔지만 ‘모르쇠’ 답변으로 일관해 국민적 분노를 샀다. 당시 5공 비리 국정조사 특위 위원이던 노 전 대통령은 증인석에 앉아 끝내 잘못을 시인하지 않은 전 전 대통령이 퇴장할 때 명패를 바닥에 집어 던져 항의한다. TV로 생중계된 이 장면은 그를 청문회 스타로 만들었다.

백담사 유배로 막 내린 5공 청문회

5공 청문회는 87년 6월 민주항쟁이 만들어 낸 ‘과실’이었다.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면서 국민은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벌였던 일련의 사태에 관한 진상이 밝혀지길 원했다. 게다가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두 달 만에 치러진 88년 4·26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이 125석을 얻은 반면 야 3당이 164석(김대중의 평민당 70석, 김영삼의 민주당 59석, 김종필의 공화당 35석)을 얻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된 것이다. 야당은 정국을 움직이는 중심 동력이었다. 급기야 야 3당은 ‘5공 비리 척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국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과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 권력형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을 통과시켰다.

5공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청문회장으로 불려 나왔다. 하지만 증인들의 ‘모르쇠’ 태도와 거짓 답변으로 국민의 기대만큼 진상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꺾일 줄 모르는 성난 민심은 결국 검찰의 5공 비리 수사로 이어지게 했고, 전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를 비롯해 47명이 구속되고 29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이후 전 전 대통령 내외는 백담사로 사실상의 유배를 떠나야 했다.

YS 대선자금까지 불똥 튄 한보 사건

우리 경제가 악화일로로 치닫던 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철강이 부도가 났다. 정태수 한보 회장이 정치권·금융계의 실력자들에게 광범위한 로비를 벌인 것은 물론 특히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영삼(YS)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연루됐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문민정부 최대의 권력 스캔들로 비화된다.

검찰 수사 결과 신한국당 홍인길 의원과 국민회의 권노갑 의원 등 여야 실력자들이 한보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된다. 현철씨 역시 조세 포탈 혐의로 사법 처리된다. 이 과정에서 YS의 대선 자금 수수 의혹이 불거졌고 민심은 “검찰이 몸통은 놔둔 채 깃털만 건드렸다”며 들끓었다. 결국 국회는 한보사건에 대한 국정조사(3월 21일~5월 4일)를 실시, 현철씨와 여야 실세들을 줄줄이 증인석에 앉혔다. 하지만 5공 청문회 때와는 달리 여야 의원들의 소극적인 자세로 의혹을 밝혀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한보사건은 임기 말 YS의 레임덕을 가속화했고 그해 연말 대선(패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YS의 대선자금 문제는 이듬해 열린 IMF 환란조사특위의 한보사건 청문회에서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정 회장은 “92년 12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100억원을 전달했느냐”는 국민회의 김원길 의원의 질문에“부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봉남’ 외엔 건진 것 없었던 옷로비 청문회

1999년 옷 로비 의혹 사건 청문회에서 증인들이 선서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태정 전 법무장관 부인 연정희씨,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김대중(DJ) 정부 때도 국정조사가 여러 번 열렸다. 대표적인 게 옷 로비 사건 청문회(99년)다. 형식은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진상조사였지만 그 내용은 사실상의 국정조사였다.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 부인이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에게 고가의 옷을 선물, 로비를 벌였다는 언론 보도로 촉발된 이 사건은 조폐공사 파업 유도사건, 3·30 재·보선 50억원 사용 의혹 등과 겹치면서 여론을 탔다. 그해 8월 옷 로비 사건에 대해 청문회가 열려 재벌과 정부 고위층 부인들이 증인으로 나왔다. 특히 유명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참고인으로 나와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증인들의 연이은 거짓 답변과 의원들의 준비 부족 등으로 로비 의혹에 대한 진상을 캐내지 못하고 오히려 의혹만 부풀렸다. 이 과정에서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란 사실이 일반에게 알려져 세간에선 “청문회에서 알아낸 건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란 우스갯소리가 나돌기도 했다.

로비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하자 정치권은 ‘솜방망이 청문회’ ‘국정조사 무용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국회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에 떠밀린 여야는 결국 99년 9월 특검 검사의 수사 기간을 최대 70일로 하는 옷 로비 사건 특별검사제 법안에 합의했다.

국정조사가 오늘날과 같은 틀을 갖춘 13대 국회 때부터 지금까지 이뤄진 국정조사는 모두 21건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특검제가 정착되고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특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국정조사가 다소 시들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이라크에서 테러집단에 의해 피살된 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청문회(2004년)가, 지난해 11월엔 쌀 직불금 불법 수령 문제에 대한 국정조사가 열렸지만 국민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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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국회 이후 국정조사 21번 … 지금 하려면 의원 75명 이상 요구해야

국정조사란 국회의원들이 국정 운영에 영향을 끼치는 특정한 사안에 대해 직접 조사하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밝히는 것을 말한다. 입법권과 예산권·국정통제권을 효율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국회의 고유 기능이다. 13대 국회 이래 지금까지 21건에 대한 국정조사가 이뤄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IMF 경제위기 ▶이라크 테러집단에 의한 한국인(김선일씨) 피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국회의 국정조사권은 헌법에 명시돼 있다. 헌법 제61조 1항은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거나 특정한 국정 사안에 대해 조사할 수 있으며 이에 필요한 서류 제출 또는 증인 출석과 증언이나 의견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인 제헌 헌법(1948년 제정)엔 국정감사 조항만 있고 국정조사권은 국회법에 규정돼 있었다. 그러다가 80년 제8차 개정 헌법(5공화국 헌법) 때 헌법에 국정조사권이 명시됐다. 국정조사제도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으로 인해 명시적으로 폐지(72년 12월~75년 7월)된 것을 제외하곤 제헌국회 이래 계속 존재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국정조사가 국회가 정부를 견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쓰인 건 13대 국회(88년 5월~92년 5월) 때부터다.

국정조사가 이뤄지려면 국회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어야 한다. 현재 재적의원이 298명이므로 국정조사를 하려면 의원 75명 이상의 이름으로 조사 목적·범위 등을 정한 조사요구서를 제출해야 한다. 조사요구서가 올라오면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보고하고 각 교섭단체(20명 이상의 의원으로 구성) 대표 간 협의를 통해 특별위원회를 만들지, 아니면 관련 상임위 내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지를 결정한다. 이후 교섭단체 의석 비율에 따라 조사위원을 선임하고 위원장 및 간사를 선출해 국정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원회가 작성한 조사계획서가 국회 본회의 승인을 얻으면 서류 제출, 증인 출석 요구, 예비조사 등을 거쳐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된다. 국정조사 후엔 조사결과 보고서를 작성해 국회에 제출, 본회의에서 이를 의결해야 한다.

국민의 대표가 진행하는 국정조사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우선 3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나 사법부의 고유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국정조사를 핑계로 행정 작용에 정치적 압력을 넣는다거나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 등에 대해 간섭할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국정조사의 목적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내용인 경우나 ▶군사·외교·대북 관계 등 국가 기밀과 관련된 사항도 국익의 보호 차원에서 국정조사권이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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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헌법, 최초로 국정조사권 명시

세계사적으로 최초의 국정조사는 1689년 영국 의회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의 폭동 진압 과정을 조사한 것을 꼽는다. 헌법에 국정조사권을 처음 규정한 것은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