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부자열전-1]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명나라 환관 갑부 ‘류근’
기사입력 2017-02-06 14:09:34 | 최종수정 2017-02-24 12:18:33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탐욕무염(贪欲无厌),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
명나라 정덕(正德) 연간 환관을 지낸 류근(刘瑾 1451-1510)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환관이라는 특수한 직책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의 부정축재 재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에서 선정한 ‘과거 1000년간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50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니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을 보유했음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본문 첨부 이미지](https://file.mk.co.kr/chinafocus/2017/02/201702060209591580943.jpg)
류근은 산시(陕西)성 흥평(兴平) 출신으로 본래 성은 담(谈)씨였는데 여섯 살 때 환관 류순(刘顺)에게 입양돼 류씨로 성을 바꿨다. 양아버지를 따라 6살 때부터 환관의 길을 걸었는데 당시 어린 명무종(明武宗)인 주후조(朱厚照) 태자 시중을 들어 훗날 황제가 될 사람과 유년시절을 같이 보내는 행운을 누렸다. 비록 신분은 달랐지만 어릴 때부터 본인을 보살피고 같이 놀아준 류근에 대한 명무종의 신임은 당연히 두터웠을 수밖에 없었다.
명무종 직위 후 황제의 전폭적인 신뢰와 비호를 받은 류근은 갈수록 기고만장 했다. 보통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등에 지고 온갖 뇌물을 챙겨 재산을 부풀렸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최정예 호위무사로 구성된 황제 친위대 금의위(锦衣卫)를 장악해 개인 경호원으로 개편했다. 황제의 두터운 신임으로 금전적 욕심이 충족되니 권력 욕심에도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류근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지 보여주는 대목은 류근의 별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궁궐 내부에선 2명의 황제를 모셨다고 전해지는데 한명은 서있는 황제(立地皇帝) 류근, 다른 한명은 앉아있는 황제(坐地皇帝) 명무종이였다. 류근은 팔호(八虎)라는 8명의 환관으로 구성된 사조직을 결성하고 이를 이용해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황제의 무한 신뢰와 탄탄한 사조직을 배경으로 그의 뇌물수수 행위는 더 대담해지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매관매직을 일삼고 각 지방 및 황실 관료들의 인사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승진을 앞둔 지방관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뇌물 청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 관료가 베이징에 입성하면 항상 황제보다 류근에게 먼저 인사를 드려 조공을 바치게 했는데 그 금액은 적게는 은 천 냥부터 만 냥까지 다양했다.
![본문 첨부 이미지](https://file.mk.co.kr/chinafocus/2017/02/201702060210231310286.jpg)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광기 어린 그의 탐욕은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다. 황제의 총애로는 부족해 진정한 권력을 누리고 싶었던 그는 미리 본인의 용포와 옥새를 제작하고 황실 장악을 위한 갑옷과 무기를 비축했다.
평소 류근의 소행을 탐탁치 않아 했던 당시 문학가이자 대신인 양일청(杨一清)은 최근 류근 일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류근에 불만이 많았던 사조직 팔호 중 한명인 장영(张永)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양일청은 류근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장영을 통해 류근의 과거 비위 행위와 반란모의 관련 증거를 수집 후 ‘17가지 죄명’을 작성해 무종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무종은 격노해 즉각 어명을 내려 류근을 체포하고 자택을 수색했다. 자택에서 나온 물건들은 4000여점의 국보, 황금 250만 냥, 은 5000만 냥 등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무종으로 하여금 등골이 섬뜩하게 만든 압수품 중 하나는 류근이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부채였다. 그 부채의 날개 안쪽에는 날카로운 비수 2개가 숨겨져 있었는데 황제와 독대를 자주하는 그가 항상 주위를 멤돌면서 암살할 기회를 호심탐탐 엿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명나라 역사 실록인 ‘명사기사본말’(明史纪事本末)은 당시 류근의 자택에서 황금 2987만 냥, 금은보화 500만 점, 은 800만 냥 등이 압수되었다고 기록했다. 현재 금값과 은값 시세로 따지면 한화 55조 원에 육박한다. 이는 당시 명나라 10년치 국가재정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류근 한사람으로 인해 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피폐한 삶을 살았는지 안 봐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탐욕자의 최후는 비참했다. 류근은 총 3357회의 칼질이 가해진 능지형을 당했다. 당시 공개로 진행된 류근에 대한 능지형은 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과 그의 모함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 수백명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복수라도 하듯이 바닥에 떨어진 류근의 살점을 씹어 먹으며 울분을 해소했다고 한다.
[봉황망 중한교류 채널] 윤이현 기자 yoon@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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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정덕(正德) 연간 환관을 지낸 류근(刘瑾 1451-1510)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환관이라는 특수한 직책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의 부정축재 재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에서 선정한 ‘과거 1000년간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50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니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을 보유했음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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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근(刘瑾) 초상화 / 사진출처 = 바이두 백과(百度百科)
류근은 산시(陕西)성 흥평(兴平) 출신으로 본래 성은 담(谈)씨였는데 여섯 살 때 환관 류순(刘顺)에게 입양돼 류씨로 성을 바꿨다. 양아버지를 따라 6살 때부터 환관의 길을 걸었는데 당시 어린 명무종(明武宗)인 주후조(朱厚照) 태자 시중을 들어 훗날 황제가 될 사람과 유년시절을 같이 보내는 행운을 누렸다. 비록 신분은 달랐지만 어릴 때부터 본인을 보살피고 같이 놀아준 류근에 대한 명무종의 신임은 당연히 두터웠을 수밖에 없었다.
명무종 직위 후 황제의 전폭적인 신뢰와 비호를 받은 류근은 갈수록 기고만장 했다. 보통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등에 지고 온갖 뇌물을 챙겨 재산을 부풀렸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최정예 호위무사로 구성된 황제 친위대 금의위(锦衣卫)를 장악해 개인 경호원으로 개편했다. 황제의 두터운 신임으로 금전적 욕심이 충족되니 권력 욕심에도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류근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지 보여주는 대목은 류근의 별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궁궐 내부에선 2명의 황제를 모셨다고 전해지는데 한명은 서있는 황제(立地皇帝) 류근, 다른 한명은 앉아있는 황제(坐地皇帝) 명무종이였다. 류근은 팔호(八虎)라는 8명의 환관으로 구성된 사조직을 결성하고 이를 이용해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황제의 무한 신뢰와 탄탄한 사조직을 배경으로 그의 뇌물수수 행위는 더 대담해지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매관매직을 일삼고 각 지방 및 황실 관료들의 인사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승진을 앞둔 지방관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뇌물 청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 관료가 베이징에 입성하면 항상 황제보다 류근에게 먼저 인사를 드려 조공을 바치게 했는데 그 금액은 적게는 은 천 냥부터 만 냥까지 다양했다.
![본문 첨부 이미지](https://file.mk.co.kr/chinafocus/2017/02/201702060210231310286.jpg)
▲ 부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류근의 일대기는 중국 영화와 드라마의 좋은 소재로 쓰이고 있다. / 사진출처 = 역사지가(历史之家)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광기 어린 그의 탐욕은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다. 황제의 총애로는 부족해 진정한 권력을 누리고 싶었던 그는 미리 본인의 용포와 옥새를 제작하고 황실 장악을 위한 갑옷과 무기를 비축했다.
평소 류근의 소행을 탐탁치 않아 했던 당시 문학가이자 대신인 양일청(杨一清)은 최근 류근 일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류근에 불만이 많았던 사조직 팔호 중 한명인 장영(张永)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양일청은 류근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장영을 통해 류근의 과거 비위 행위와 반란모의 관련 증거를 수집 후 ‘17가지 죄명’을 작성해 무종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무종은 격노해 즉각 어명을 내려 류근을 체포하고 자택을 수색했다. 자택에서 나온 물건들은 4000여점의 국보, 황금 250만 냥, 은 5000만 냥 등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무종으로 하여금 등골이 섬뜩하게 만든 압수품 중 하나는 류근이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부채였다. 그 부채의 날개 안쪽에는 날카로운 비수 2개가 숨겨져 있었는데 황제와 독대를 자주하는 그가 항상 주위를 멤돌면서 암살할 기회를 호심탐탐 엿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명나라 역사 실록인 ‘명사기사본말’(明史纪事本末)은 당시 류근의 자택에서 황금 2987만 냥, 금은보화 500만 점, 은 800만 냥 등이 압수되었다고 기록했다. 현재 금값과 은값 시세로 따지면 한화 55조 원에 육박한다. 이는 당시 명나라 10년치 국가재정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류근 한사람으로 인해 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피폐한 삶을 살았는지 안 봐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탐욕자의 최후는 비참했다. 류근은 총 3357회의 칼질이 가해진 능지형을 당했다. 당시 공개로 진행된 류근에 대한 능지형은 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과 그의 모함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 수백명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복수라도 하듯이 바닥에 떨어진 류근의 살점을 씹어 먹으며 울분을 해소했다고 한다.
[봉황망 중한교류 채널] 윤이현 기자 yoon@ife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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