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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42) 김성중 - 막걸리 리어카를 끄는 아저씨

ngo2002 2012. 8. 8. 09:57

[내 인생 마지막 편지](42) 김성중 - 막걸리 리어카를 끄는 아저씨

나에게는 단 한 장의 종이가 남아 있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흰 종이가 수많은 수신자를, 벗들과 적들을 넘어 거의 전 인류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적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파는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세 번쯤 당신이 파는 술을 마셔 보았고 서른 번쯤 막걸리통으로 그득한 당신의 리어카를 목격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연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놀이터에서, 공원에서, 길가에서, 도처에서 막걸리를 팔았습니다. 당신의 옷차림만큼이나 낡고 닳은 리어카 바퀴가 멈추는 순간이면 어디서나 당신의 상점이 되곤 했습니다. 까맣게 탄 얼굴, 크고 우렁우렁한 목소리, 아무에게나 서슴없이 다가가 막걸리를 권하는 모습. 홍대를 이루는 풍경 중에 당신 또한 중요한 모자이크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내게 ‘풍경’ 중의 하나입니다.

인디 밴드의 거리공연을 보고 난 후 친구와 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갑자기 공기 한쪽이 소란스럽게 무너지더니 당신이 다가와 막걸리를 권했습니다. 비싸지 않은 술인 데다 출출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막걸리를 사기로 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세’에 눌려 천원짜리를 꺼냈습니다. 강권하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박력이 지나치게 넘친다고 할까요. 우리가 막걸리를 사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지갑을 열었습니다.

두번째로 당신의 막걸리를 마신 것은 한낮입니다. 역시 배경은 놀이터입니다. 어쩐 일인지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외국 배우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구경할 새도 없이 무대가 막을 내리자(무대도 막도 없지만 공연이 끝나자) 당신이 나타나 배우들에게 막걸리를 한 잔씩 따라주기 시작했습니다. 외국 배우에게는 ‘코리안 와인’이라며 콸콸 따라주었고 적지 않은 수의 관객에게도 공짜로 술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인 듯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는 도처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항상 서둘러 어디를 가는 사람처럼 걸음이 빨랐고, 무거워 보이는 리어카에는 빈 술병과 찬 술병이 그득했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의 모습은 광인의 그것처럼 약간 이상해보였습니다. 목소리, 눈빛, 행동거지 모두 일반인보다 한 옥타브 높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늘 도취된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당신이 성실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 열심히, 하얀 막걸리통으로 이루어진 당신의 배를 저어 거리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노잡이처럼 보였습니다. 출렁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당신의 리어카는 언제나 바퀴가 달린 배처럼 보입니다.

막걸리를 나누어 마신 내 친구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misfit’ 저 사람은 묘하게 세상과 맞지 않다고.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말을 ‘부적응자’로 번역하는 것에 우리는 결단코 반대합니다. ‘꼭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 정확한 말이지요. 우리 눈에 당신은 거리의 막걸리상 정도가 아니라 한 부족을 이끌 족장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요.

당신이 가진 에너지의 종류가 이 시대와 맞지 않아서, 그렇다고 다른 이들처럼 적당히 마모된 채 끼어들어갈 수 없어서, 그래서 살아가는 나름의 방식을 터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이 발동한 것입니다. 추측이 낭만적이었던 것은 조금 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화는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둘 다 <모비딕>을 읽었고, 기세 좋은 사람들이 전력으로 무언가를 뒤쫓던 시대가 지나가버렸다는 슬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모비딕>에 나오는 에이해브나 스타벅은 없어, 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리어카가 거리 끝에서 불쑥 출몰한 것입니다. 펼쳐진 책장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글자처럼. 우리가 미처 못 읽은 등장인물처럼요.

에이해브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피쿼드호의 선장이 될 수 있었을까? 스타벅은 일등항해사가 아니라 스타벅스의 알바생이 되어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사라지는 피쿼드호를 바라보듯 당신의 리어카를 배웅했습니다.

이제 커다란 시간 한 장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다음 시대, 다음 페이지에서는 부디 더 큰 술통과 배를 누리시길. 그 풍경 어딘가에서 당신의 술 한 모금을 마실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김성중 | 소설가>

입력 : 2012-08-05 22:03:28수정 : 2012-08-05 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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