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명리

40.인자가 숨어든 넉넉한 천국- 덕유산(5)삼재불입의 대 명당에 세워진 사

ngo2002 2011. 4. 18. 09:21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40.인자가 숨어든 넉넉한 천국- 덕유산(5)삼재불입의 대 명당에 세워진 사고
입력시간 : 2011. 02.07. 00:00


한국의 백경 중 특이한 모습의 적상산성은 마음을 칼칼하게 씻어주는 호수가 있어서 아름다움의 백미이다.
덕유산 명례궁·사고지 대중에도 '영향'

자급자족 가능한 환경 갖춘 풍수적인 명당

적상산성에 자리잡은 호수 아름다움 '백미'

흙으로 덮인 정상 울창한 나무 원시림 방불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오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를 영구보존하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에 따로따로 분산해서 사고史庫를 지어 보관했다. 임진왜란으로 장기간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불에 타고 남은 중요한 국가기록물을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만 했다.

조정에서는 사명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 지을 사고 터로 풍수지리학적으로 가장 안전한 삼재불입(三災不入)의 땅을 찾아내도록 지엄한 명을 내렸다. 당시에는 관상감(觀象監)이 그런 일을 처리해야 하지만 관료풍수가들을 배척하고 스님들께 의뢰한 것이다. 고명한 사명대사는 너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아왔고 전국제일의 풍수지리 대가인 그를 대적할만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핍박받아오던 승려들이었지만 필요시에는 아무 때나 불러 썼다. 고고한 인품의 스님들은 부당하고 편파적인 대우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했다. 당대의 제일가는 선승이셨던 사명대사는 풍수지리에도 일가를 세울 만큼 탁월하셨다. 유교를 국교로 내세운 조선에서 천대받아온 그였지만 나라를 위한 일에는 마음을 비우고 정성껏 일했다.

삼재란 글자 그대로 세 가지의 재앙을 말하는데 풍風 수水 화火 즉 태풍, 홍수, 화재를 일컫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병란, 태풍, 흉년, 전염병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특히 병란을 가장 무서워하고 이를 피할 방도를 찾는데 급급했다. 누구나 목숨을 보신할만한 땅을 찾아 숨어드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시중에 떠돌던 뜬 구름 잡기 같은 십승지도 그래서 태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나섰던 곳!

이상향에 대한 관념은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적 속성에 따라 차이가 났다. 마음속 그곳은 찾아가볼만한 곳이었다. 우리들이 그리는 이상향의 뜻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과 정토,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에덴동산이나 천국, 도교와 신선사상의 무릉도원도 있다. 사후나 관념적인 이상세계를 말하지만 흔히 쓰는 길지, 낙토, 낙원, 복지, 명당, 가거지도 같은 의미의 이상향이며 유토피아라 하겠다.

사명대사가 찾아낸 자리에 사각(史閣)을 지어 국가보물을 보관할 장소로는 덕유산의 적상산성이 최적이라고 했다. 산성 안에는 풍수가 어울리고 병화가 미치지 않을 곳에 절까지 지었다. 그런 다음 사각을 지키면서 중요한 실록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사찰 내에 승병까지 주둔시켰다. 이중 삼중의 안전벨트까지 동여맨 것이다.

안국사의 주지에게는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總攝)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했다. 이렇게 해서 불교의 위상을 올리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발판까지 마련했다. 이 벼슬은 조선 오백년의 역사에서 임진왜란 이후 한말까지 사찰과 승려에게 내려진 유일한 벼슬이었다. 실로 탁월한 선택이라 하겠다.

암벽이 붉고 가을의 단풍철이 되면 온 산은 예쁜 여자가 붉은 치마를 입은 것과 같다고 해서 적상산(赤裳山)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산의 정상부근에 반반한 평지가 있어서 천혜의 요새로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길지다. 덕유산의 서북쪽에 자리한 적상산은 오늘날의 국립공원 덕유산지역에 포함되는 곳으로 장방형의 길쭉한 산성으로 인공으로 깎아낸 것 같은 거대하며 붉은색의 바위를 말한다.

사고를 짓고 실록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찰이 있어야했다. 나라의 보전을 위한 절로 이름도 안국사(安國寺)라 부르며 사고를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적상산사고는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불에 타고 없어졌다가 다시 살아남는 사고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이곳 사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직후 사고에 불이 나면서 전소되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사고 속에 실록이 없었기에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일순간에 잿더미로 변할 뻔한 위기의 찰나를 풍수지리의 기와 불력에 의해 실록만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던 것이다.

승지란 글자 그대로 자연경관과 거주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한다. 흥미를 끄는 대목은 정감록이라는 기서에서 국토의 열 곳을 지적했는데 그중에서도 덕유산의 명례궁과 사고지는 일반대중들에게 강력한 의미로 어필하며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보물단지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실록을 모실 장소로는 깊은 산속에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적상산의 꼭대기 산성 속 평지가 으뜸이다. 산성을 둘러싸듯 흐르는 냇물이 인공해자보다 더 우수한 방어수벽 역할을 해준다. 분지 안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는 외부의 어디에도 없다. 바깥으로 전혀 노출이 되지 않는 은밀하고 비밀스런 장소이다.

분지 안에는 물이 풍부해서 식량을 생산하고 사람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는 곳이다. 어느 쪽으로도 적의 침입이 어렵다. 이곳은 애초부터 전란이 들지 않고 몸을 보신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산성 안이 복지로 불리는 중요한 이유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풍수적인 명당의 요건으로 빠질 수 없는 조항은 스스로 먹고살며 자리를 지키고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외부의 협조 없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경작이 양호하고 들판이 기름지며 배산임수의 자연적인 조건에 합당한 곳이 적상산성 안이다.

덕유산 속에 들어앉은 적상산성은 사방으로 흐르는 냇물이 보신의 방비막이 되어주고 안전한 삶을 일구어갈 수 있게 해준다. 어디 할 것 없이 덕유산 전체를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적상산성(사적 제146호)은 덕유산 적상면 자락에 사고를 품안에 껴안고 있다. 16세기 국가에서 편찬한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침략했을 때 근방에 사는 여러 고을의 군민들이 모두 이곳 산성으로 모여들어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백경 중 특이한 모습의 적상산성은 마음을 칼칼하게 씻어주는 호수가 있어서 아름다움의 백미이다. 장도바위, 장군바위 등 자연명소와 최영장군이 건의해서 쌓았다는 산성이 거부감 없는 일체를 이룬다. 축조한 성의 높이도 가슴높이에 불과해서 감출 것도 없고 오히려 편안하다. 정상은 흙으로 덮인 토산이라 원시림을 방불케 한 나무들이 울창하다.

산의 중간은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겹겹으로 둘러쌌다. 남쪽 절벽위에 위치한 안렴대는 사방이 천 길 낭떠러지로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려오며 온몸이 오싹하고 무섬증이 든다. 아슬아슬하게 내려다보이는 산 밑은 보기만 해도 두렵고 아찔하다.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했던 곳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사고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에 있는 동굴 같은 석실로 옮겨 무사하게 난을 피했던 유서 깊은 곳도 바로 여기다.

오지며 벽지라 사고를 세우고 침략자들의 눈을 피할 수 있어서 나라님도 안심할 수 있는 발복지였다. 무주의 적상산을 오르는 길은 1천m가 넘는 고지대를 빙글빙글 돌면서 정상까지 차를 운전하며 오를 수 있다. 꼬부랑 산길속의 적상터널을 지나면 조선 오백년의 비밀스런 역사를 품고 있는 하늘위의 호수가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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