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36> 한국의 인쇄 문화
조선시대엔 새 임금 오르면 옛 임금 때 활자 녹여 새로 만들었지요
배영대 기자
신라시대 목판인쇄
석가탑서 나온 세계 첫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다라니경 |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21호)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그것. 일본의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보다 약 20년 정도 앞선다. 석가탑의 건립시기인 751년(신라 경덕왕 10)께 탑 속에 봉안한 것으로, 인쇄 시기는 75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목판인쇄
팔만대장경의 전신 ‘초조대장경’, 내년에 1000년 맞아
| 초조대장경 |
고려시대 금속활자
세계 최초 공인 ‘직지’에 100년 이상 앞선다는 ‘증도가’
| 직지 |
고려 금속활자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린 계기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흔히 ‘직지’라고 부르며, 현존하는 금속활자본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공인받았다. 1377년(고려 우왕 3)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했음을 발문에 밝혀 놓았다.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보다 78년 앞선 것이다.
세계의 공인은 받지 못했지만 문헌상으로는 ‘직지’보다 앞선 것이 있다. 1234년(고려 고종 21) ‘상정예문(詳定禮文)’ 28부와 1239년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금속활자로 인쇄됐다는 기록이 전한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발문에 “증도가는 참선하는 데 매우 요긴한 책이지만 전래되지 않아 기존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이 책을 1239년에 다시 목판으로 새겼다”고 기록돼 있다. 최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새로 발견됐다는 주장은 이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증도가’를 인쇄한 금속활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따르면 고려 정부는 금속활자로 ‘상정예문’ 28부를 찍어 해당 관청에 나눠 주고 보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록 책은 전하지 않더라도 13세기 초 이미 금속활자 인쇄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전기 금속활자
세종 때 활자의 꽃 ‘갑인자’, 세계 첫 납활자 ‘병진자’
조선은 ‘금속활자의 나라’였다. 중앙정부에 활자주조 관청인 주자소를 설치해 만든 활자가 무려 40여 종이나 된다. 새 왕이 즉위하면 기존의 활자를 녹여 새 활자를 만들어 내곤 했다. 가장 주목할 임금은 세종이다. 세종 대왕은 인쇄문화를 꽃피우는데도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세종 때 만든 ‘갑인자(甲寅字)’는 ‘금속활자의 꽃’으로 평가받는다. 한글 창제 직후인 1447년엔 한글 금속활자까지 만들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인쇄했다.
| 계미자 |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꽃으로 불리는 것은 ‘갑인자’다. 1434년(세종 16) 주조됐다. 갑인자는 당시 금속활자 인쇄술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활자다. 활자의 네 면이 반듯하고 평평하며, 크기는 큰 글자가 가로 1.6㎝·세로 1.4㎝이고, 작은 글자가 가로 0.8㎝·세로 1.4㎝다. 높이는 0.6∼0.8㎝다. 글자체가 부드럽고 아름다워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다. 1434년 처음 만든 것을 초주갑인자, 이후 순서대로 재주갑인자·삼주갑인자·사주갑인자·오주갑인자·육주갑인자 등으로 부른다.
| 갑인자 |
성종이 즉위하면서는 유교 서적이 대거 인쇄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유교 질서가 확립되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세조 때까지만 해도 불교서적이 많이 인쇄됐다. 유교 질서의 확산에 때를 같이하며 주조된 활자가 ‘갑진자(甲辰字)’이다. 1484년(성종 15) 중국에서 간행된 『구양공집(歐陽公集)』 『열녀전(烈女傳)』의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1493년(성종 24)에는 명나라 목판본 『자치통감강목』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한 ‘계축자(癸丑字)’가 주조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목판인쇄와 목활자
임진왜란으로 금속활자 많이 잃자 목활자 성행
조선시대에 금속활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의 목판인쇄술은 조선시대에 그대로 전래돼 판각이 계속 이뤄졌다. 조선 초기 왕실불교의 성행은 불교경전의 간행에 영향을 끼쳤다. 세조(1455~1468)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불교경전 등을 한글로 번역해 간행하기도 했다.
목활자 인쇄도 중앙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용됐다. 경비와 인력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1448년 『동국정운(東國正韻)』과 1455년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의 큰 글자를 비롯해 많은 문집과 족보가 목활자로 간행됐다. 임진왜란 이후엔 한동안 목활자가 주요 인쇄를 전담했다. 훈련도감이 교서관(校書館)을 대신해 목활자를 만들고 인쇄를 담당했는데 전란 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활자들을 ‘훈련도감자(訓練都監字)’라고 부른다. 금속활자 인쇄가 복구된 뒤에도 금속활자 인쇄를 보완하면서 사용됐다.
조선후기 금속활자
기술 복구했지만 고종 때 도입한 일본 납활자가 득세
조선의 인쇄문화는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 전과 후로 구분된다. 많은 활자와 전적들이 전쟁으로 소실됐다.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일본의 인쇄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우리에겐 큰 타격이었다.
1617년(광해군 9) 임진왜란으로 중단됐던 기존의 금속활자 기술을 복구하고자 다시 주자도감(鑄字都監)이 설치되고 갑인자를 닮은 금속활자를 만들기 시작, 다음 해인 1618년 7월에 ‘무오자(戊午字)’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두 번째로 만들어진 금속활자는 ‘무신자(戊申字)’이며, 영조 말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 사용됐다. 정조가 즉위한 1777년에 평안감사 서명응에게 명령해 갑인자를 글자체로 하는 크고 작은 활자 15만여 자를 만들게 했다. 이 활자는 ‘정유자(丁酉字)’로 규장각(奎章閣)의 본원인 내각(內閣)에 보관하면서 사용했다. 국립도서관 격인 규장각은 도서의 정리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인쇄 정책의 총본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어 1816년(순조 16) ‘전사자(全史字)’, 1858년(철종 9) ‘삼주한구자(三鑄韓構字)’ ‘재주정리자(再鑄整理字)’ 등이 계속 주조됐다. 하지만 조선의 국운이 다해 가면서 금속활자의 운명도 기울었다. 한국 전통의 금속활자는 1880년(고종 17) 일본에서 만든 납활자가 도입되면서 점차 사용이 줄었다. 일본은 1590년 이탈리아의 선교사로부터 납활자를 도입한 이래 19세기께 이미 납활자 인쇄가 활성화됐다. 납활자는 금속활자보다 열처리 공정이 쉽고 가격도 쌌다. 근대의 인쇄문화는 납활자의 시대였다. 이 대목에서도 일본이 발 빠르게 움직인 셈이다.
자료=청주고인쇄박물관 제공
도움말=이승철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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