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1> 나홀로 문화 어디까지 왔나

ngo2002 2019. 5. 9. 10:25

1인 가구 크게 늘자 '혼밥' 일상화… '공동체' 개념이 바뀐다 [대한민국 신인간관계 보고서]

[창간 30주년 특집] <1> 나홀로 문화 어디까지 왔나
2000년 222만→2015년 520만 가구/2045년 전체 가구 중 36% 차지 전망/인간관계 스트레스에 혼자만의 시간/최근 자기만족 최우선 ‘소확행’ 인기
‘우리’보다 ‘자신’ 중시 경향 급속 확산/ 일각, 공동체 유지 위기 우려 커지지만/ 전문가 “이런 변화는 되돌리기 힘들어”/ 변화 걸맞은 시스템 정비 필요성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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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2-06 08:00:00      수정 : 2019-01-31 15:06:28

대한민국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새롭게 변하고 있다. 나홀로족은 위세가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나만의 행복을 찾는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에 대한 반작용이자 삶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갑질로 대표되는 낡은 관계의 저항은 강력하다. ‘우리’보다 ‘나’에 대한 관심이 공동체의 위기를 심화시킬 거란 걱정도 크다. 세계일보는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아 연중기획 ‘대한민국 신인간관계 보고서’를 싣는다. 변화된 관계의 현황을 점검하고 그것의 가능성과 미래를 점쳐보려 한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낡은 관계의 실상도 파헤칠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전망도 가능할 것이다.

공동체 문화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어색하고, 민망한 일로 치부되었으나 이제 ‘혼밥’은 일상화되다시피 한 풍경이 됐다. 서울 한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혼밥을 즐기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1. “바쁠 때는 5명 정도의 동료들과 일과 시간 전부를 보내다시피 합니다. 제가 팀장이긴 한데 팀원 중에 선배도 있어서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진 않는데도 금요일쯤 되면 동료들과 뭔가를 해야 한다는 자체에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주말엔 철저하게 혼자 놀며 나름의 사치를 즐깁니다. 와이프도 그러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를 시도한 결과 만족도가 높은 책사기, 영화보기, 커피숍에서 빈둥거리기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일종의 재충전인 셈이죠.”(정모씨·44세)

# 2. 특허청이 최근 5년간 가정간편식(손쉽게 조리할 수 있도록 식재료를 가공·조리해 포장한 즉석식품 등) 분야의 상표 출원 현황을 분석해 지난해 10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인 가구를 겨냥한 식품의 상표 출원이 크게 늘었다. 대표적인 간편식인 즉석밥의 상표 출원은 지난 2013년 43건에 불과했으나 2017년에는 285건으로, 5년 사이 6배 넘게 증가했다. 조리된 피자, 수프도 같은 기간 각각 2건에서 75건, 1건에서 140건으로 크게 늘었다.

‘혼술’ ‘혼밥’ ‘홀로’ ‘혼자’ 등의 단어가 들어간 브랜드명도 2013년 17건, 2015년 31건, 2017년 45건으로 증가세가 뚜렷하다. 한 대형마트의 지난해 디저트 관련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2.3% 올랐다. 사회 변화의 흐름에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경제 분야의 이런 수치는 ‘나홀로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며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혼밥, 혼술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혼영’ ‘혼행’ 등 나홀로족의 활동을 이르는 다양한 조어(造語)들이 여기저기서 애용된다. 혼자 디저트를 즐기는 ‘혼디족’이란 단어가 회자되기도 한다.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이 익숙하고 집단적 가치의 위세가 압도해온 한국 사회의 이런 변화는 어디까지 왔고, 어느 정도까지 확산될까. 일상화 수준에는 이미 이르렀고, 한동안은 보다 파편화된 형태로 진전될 것이란 전망이 강하다. 바뀐 현실을 반영한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지만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어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나홀로 문화의 확산, ‘우려’와 ‘기대’의 공존

나홀로 문화의 현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치는 ‘1인 가구’의 증가다. 이런 문화가 최근 몇 년 사이 급속하게 확산된 것도 이 같은 가족 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다.

통계청의 ‘2015∼2045년 인구추계’에 따르면 1인 가구는 2000년 222만가구에서 2015년 520만가구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는 같은 기간 15.5%에서 27.2%로 껑충 뛰어 비중이 가장 높다. 2045년이 되면 809만가구(36.3%)로 늘어날 것으로 통계청은 예측한다. 이런 가족 구조는 일상 활동이 개인을 단위로 축소되는 토대가 됐다.

사회적 시선의 변화도 뚜렷하다. 혼밥, 혼술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본격화될 무렵에만 해도 나홀로 활동은 파편화된 인간관계, 공동체 가치의 붕괴, 집단주의에 대한 반작용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지나친 경쟁 의식, 취업난, 경제난, 경직된 위계질서 등 다양한 이유로 인간관계가 주는 스트레스가 강해지면서 혼자만의 공간, 시간 속으로 도피하려는 게 나홀로 문화 확산의 원인이 된 게 사실이다. 3년차 취업준비생인 강모(29)씨는 31일 “가족의 최대 관심사는 나의 취업 여부일 뿐이고, 직장을 얻은 친구들을 만나면 자격지심이 생기기 마련”이라며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있다보니 언젠부턴가 인간관계를 최소화하는 게 생존전략처럼 되어버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병희 서울대 교수 등은 1005명을 대상으로 한 면접조사를 토대로 지난해 발간한 책 ‘아픈 사회를 넘어’에서 한국인의 ‘개인적 스트레스’는 ‘가족과 친구 등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41.4%), ‘직장 스트레스’는 ‘인간관계’(30.2%)에서 비롯된다는 연구 결과를 담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나홀로 문화의 긍정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한층 강해졌다. 자기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소확행’이 화두가 된 것이 대표적이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1인체제(나홀로 활동)’ 관련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2.1%가 “혼자서 보내는 시간은 자발적으로 스스로 만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스스로가 원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많고, 그 시간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경희대 이택광 교수는 “나홀로 활동의 확산은 객관적인 현실이고 근본적인 변화”라며 “좋고 나쁘고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기준, 방식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새로운 관계에 걸맞은 시스템 정비해야”

나홀로 문화의 일상화는 기존의 관념에서 보면 공동체 유지의 위기로 비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되돌리기 힘든 성격의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위기로 간주하기보다는 새로운 공동체 형태가 들어서고 있고 이에 걸맞은 시스템과 인식 등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성욱(38)씨는 지난해부터 온라인에서 만들어진 독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SNS로 교류하다 우연히 오프라인 모임에까지 나가게 됐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맞댄다. 강씨가 꼽는 이 모임의 장점은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기존 관계의 ‘끈끈함’과는 다른 ‘쿨함’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서로에 대해 냉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취향이 비슷하니 함께 즐기고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유쾌하다”며 “솔직히 언제든 끊을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에 모임 사람들에 대해서는 부담감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강씨 사례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타인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관계 속에서 나름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욕구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이전과 달라진 것이지 공동체적 가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형성된 강고한 형태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뒷받침할 제도, 시스템의 미비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지만 세금, 복지 등 생활과 밀착한 제도는 2인 이상 가구를 중심으로 짜여 있는 게 대표적이다. 한신대 윤상철 교수는 “세상은 이미 바뀌었고, 그런 변화가 더 진전될 것이라는 게 분명한데 제도, 관행, 법률은 그대로다”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동체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조차 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