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학자들이 등장 못 하는 까닭
―책을 고집하는 이유가 뭔가.
“책은 아방가르드 즉, 사회의 최전선이다. 방송에는 검증돼서 익숙한 것들만 나온다. 외국에서는 잡지가 책보다 약간 먼저 가기도 하는데 우리나라는 잡지도 다 죽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책밖에 없다.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를 한다면 그만 써야겠지만, 시대와 같이 가거나 조금 빠른 문제 제기를 한다면 아직 남아 있어도 되는 것 아닌가 한다.”
―책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생활을 할 만한가.
“저는 일찍 시작해서 버틸 만하고, 독자들에게 고맙게도 아직은 인세가 생활비 평균보다는 약간 많다. 그런데 진짜 괜찮다고 하는 사회과학 관련 책들이 시장에서 버티지를 못하니 새로운 저자가 데뷔하기 힘들다. 젊은 학자들이 한국의 대표 사회과학 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기가 어렵다. 대학교수가 아닌 사회과학자는 정말 먹고살기가 어렵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야 새로운 시각과 패기가 생기는데, 이건 정말 문제다. 이어령 선생이 ‘(당대의 대가였던) 염상섭도 틀렸고 다 틀렸어’라며 앞세대 사람을 비판하면서 평론가로 등장한 때가 그의 나이 20대 초반이었다. 서로 비판하고 기존의 것을 엎어버리는 사이클이 작동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다. 신년 방송 특집토론회에 나온 패널들도 다 늙은 사람들이더라. 지적인 측면에서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 거다.”
파리 제10대학에서 생태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우석훈은 1996년 현대그룹(현대환경연구원)에 입사했다. 귀국 직후 시간강사 생활을 잠시 하다가 “너무 피폐해져서 대학이든 어디든 가장 빨리 오라는 데에 갔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현대에서 나와 에너지관리공단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김대중 정부 때 국무총리실에 파견 근무를 했다. 유엔 기후변화협약 정부 대표단으로 국제협상에 참여했다. 2012년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를 도왔다. 2014년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으로 일했고, 2016년 총선 때는 민주당 총선공약단 부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경제상황이 어렵다. 그래서인지 성장에 방점을 찍으면서 경제에 올인하려는 듯한 분위기도 느껴진다.
“경제는 더 나빠질 것 같다. 경제 운용 패턴이 과거 정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정권은 출범 초기에는 노태우 때의 보통사람 시대니 김영삼 때의 세계화 경제니 이번 정권에서는 소득주도성장이니 하면서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정책을 편다. 그러다가 반환점을 돌면 초조해하면서 토건을 한다. 이 정부도 소리소문 없이 토건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 예산이 60조원 정도 되는 것 같다.”
―최저임금 정책에서도 다소 후퇴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나. 정말 속도가 빨랐나.
“최저임금 인상은 일본 아베 정권에서 성과를 거두는 등 세계적으로 보면 보수정권에서도 많이 추진했다. 시간이 걸려야 효과를 알 수가 있다. 다만 특정 업종이 최저임금 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도록 보완책을 잘 설계했어야 했다. 최저임금 정책은 아직도 진행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결정권을 국회로 옮겼으면 좋겠다. 논의 과정을 완전 사회화하면서 보완책을 바로 입법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독일이 그렇게 한다.”
―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
“첫번째는 수소차에 대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기술적 타당성이 전혀 없는 부분에 8조원을 쏟아붓겠다는데 이렇게 되면 태양광 투자가 줄어드는 등 산업정책에 왜곡이 일어난다. 수소차에 대한 정책을 보고, 이공계 쪽에서는 ‘로비 의혹’까지 제기하는 등 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토건 부분은 꼭 필요한 것과 어쩔 수 없는 것은 하더라도 지금 책정한 예산의 반은 복지나 문화, 지식 쪽으로 돌려야 한다. 이를테면 철도 계획 하나만 빼도 전국 대학의 모든 강사들의 강의료를 다 지원할 수 있다. 몇십년째 큰집으로 옮기자며 허리띠 잔뜩 졸라맨 채 식구들에게 먹을 거나 즐길 거 등에 돈을 못 쓰게 하는 가장과 같다.”
아이들에게 학습지 교육도 안 해
우석훈은 집에서 공부하고 글을 쓰는 한편, 매일매일 아이 둘을 챙겨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보호자, 집에 오면 함께 놀아주는 친구 역할도 한다. 현장 아이디어가 많은 우석훈은 공공기관장 등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다 거절했다고 한다.
―책에 집중하려고 공직을 포기했나.
“순서가 그렇지는 않다. 공직에 갈 생각도 있었는데 둘째가 아프고 해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길래 식구들을 팽개치고 아픈 애를 두고 나다녀야 하나 싶더라. 예전에는 내가 하면 더 잘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나이가 오십쯤 되니까 내가 해도 잘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누가 해도 거기서 거기라면 굳이 내가 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냐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또 처음 학자가 됐을 때는 경제와 관련해서 역사에 내 이름 한줄만 들어가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그것도 <88만원 세대>로 어느 정도 이룬 거 같다. 그러니 이제는 사회에 진짜로 의미있는 기여를 하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높은 자리를 좇아다니다가 이다음에 죽을 때가 되면 너 뭐 하고 살았던 거냐고 스스로 후회할 것 같았다. 다른 것을 포기하고 나니까 책 쓰는 것이야말로 정말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겠더라.”
―자기가 배우고 익힌 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고픈 욕구가 학자들한테 있지 않나.
“저는 해볼 만큼 다 해봤다. 정책도 만들어보고, 총괄하는 지위에 있어보기도 했다. 그래서 더 해보고 싶은 게 사실 별로 없었다. 물론 잘해 보고 싶은 것은 아직 많이 있다.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체계적이고 어려운 요리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하하.”
새 책 주제는 10대 남자아이
“20대 문제의 출발점은 10대
중3 똑똑해지지 않으면 다 망해”
문 정부 경제정책에도 쓴소리
“과거 정부들처럼 토건으로 전환
수소차에 8조원 투입 이해 안 돼”
두 아이 사교육 전혀 안 시켜
“어릴 때 많이 놀리는 게 참교육
사회 지도자로 키우고 싶다면
조기유학·특목고 보내면 안 돼”
그의 자녀 교육 방식은 아이들을 학습시키고 훈육하는 게 아니라 공부는 가능한 한 멀리하게 하면서 많이 뛰어놀도록 하는 것이다. 올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큰애는 영어유치원은 말할 것도 없고 학습 위주의 일반 유치원에도 간 적이 없다. 세살 어린 동생과 함께 놀이 위주로 진행하는 동네 어린이집에 다닌다. 우석훈의 아이들은 둘 다 한글이나 산수, 한문 학습지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한글만 스스로 조금 깨친 정도이다. 지난해 9월 ‘에스비에스(SBS) 스페셜―사교육의 딜레마’ 편에 출연했던 우석훈은 한 유명 입시 컨설턴트한테 “부모가 똑똑해도 아이들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부모 생각에 맞춰 아이들을 작은 규모의 안락한 데서 키운다”고 ‘야단’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교육 반대 철학과 소신을 지키고 있다.
―아이들이 뒤처질까봐 염려는 안 되나.
“그런 걱정은 안 했는데 큰애 초등학교를 사립으로 보낼까 공립으로 보낼까를 놓고는 잠시 고민했다. 통학버스 때문에 사립학교를 생각해봤는데 제가 더 고생하더라도 공립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말하자면, 그건 유럽식 스탠더드의 엘리트 교육을 시켜주고 싶어서다. 뭐 특별한 건 아니다. 우리처럼 어릴 때부터 암기교육을 시키는 게 아니라 초등학교까지는 그냥 놀리는 거다. 학습 공부는 중고교 때가 되면 다시 고민하려고 한다.”
―잘 놀리는 게 유럽식 엘리트 교육이라는 건가.
“그렇다. 유럽의 비싼 학교는 지금도 <15소년 표류기>처럼 아이들을 배 태워 그리스까지 여행시킨다. 그런 것을 통해 서로 단결하고 협동하는 훈련은 시키는데 암기를 시키지는 않더라. 어학 교육도 필요할 때 하면 짧은 시간에 익힐 수 있는데 왜 어렸을 때부터 스트레스 받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 시간에 다른 거 하면서 노는 게 낫다. 예능방송을 보면 우리나라에 온 외국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 대부분은 한국에 와서 1년 정도 만에 우리말을 다 익혔더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외국어는 나중에 커서 필요할 때 익히면 된다. 요새는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니까 거기에서 너무 소외감을 안 느낄 정도로만 하면 충분하다. 어릴 때 외국어 배우는 것보다 세상을 보고 배우는 게 훨씬 낫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영어유치원이나 학원 보낼 돈으로 여기저기 자주 놀러다닌다.”
중학생 때 소설을 읽지 못하면…
우석훈의 이런 생각은 오래됐다. 큰아이가 2살 때(2013년) 그는 자신의 블로그(우석훈의 임시연습장)에 “아들은 영어학원은 물론이고 어떤 학원도 보낼 생각은 없다. 정 뭔가 교육을 시켜야 한다면 그냥 내가 시킬 생각이다. 그래서 대학을 갈 수 없다면? 지금 생각으로는 안 되면 마는 거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죽어라고 대학을 가야 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적었다.
―아직도 아들이 대학을 못 가도 좋다는 생각인가.
“자기가 자기 인생 사는 건데 대학도 싫다면 그만이다. 부모의 행복이 자녀의 기쁨이 아니지 않나.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기 삶을 사는 것을 빨리 찾을수록 그 애한테도 좋다. 엄마 아빠를 위해 사는 것은 아무리 성공해도 불행하다.”
그는 전략적인 차원에서라도 아이들을 조기 유학이나 특목고에 보내지 말라고 부모들에게 조언한다.
“자기 자식을 사회 지도자로 키우려면 제일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게 조기 유학이다. 그렇게 하면 국회의원이나 장관은커녕 하다못해 시의원도 되지 못한다. 영국의 보수들은 자식을 키울 때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절대로 고립시키지 않는다. 노동자 옆에서 자기 자식이 럭비나 축구 등의 스포츠를 하도록 키운다. 부모 후광으로 조기 유학을 갔다 온 아이들은 자기 인생의 절정기 때 사회 지도자가 될 수 없게 된다. 또 지금 10대나 그 아래의 아이들 세대에서는 국회의원이 특목고에서도 나오지 않을 거다. 일반고교에서 같이 고생하면서 컸던 애들 중에서 나올 것이다. 프랑스의 사르코지도 엘리트들이 다니는 에콜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가는 유니버시티(파리 10대학) 출신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사르코지를 기점으로 주류가 바뀔 거라고 얘기한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사회과학자답게 그의 관심은 요즈음 10대들에게 많이 가 있다. 10대 문제는 올해 쓰고 싶은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10대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큰아이 때문이다. 지난해 말 7살 난 큰아이가 드디어 게임기를 사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학원 뺑뺑이를 돌지 않아 시간이 많은 아이의 손에 게임기나 휴대폰이 들어가면 대부분 어떤 경로를 밟을지를 아는 마당에 선뜻 사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래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을 안 사 주고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다.
―블로그(우석훈의 임시연습장)에 “모두가 포기한 중3 남학생이 똑똑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다 망한다”라고 썼더라.
“농업에 대한 책, 젠더 경제학에 대한 책을 쓰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두가지 모두에서 10대 남자들이 가장 뜨거운 분석 대상이다. 젠더 문제에서 남자들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거의 한국에만 있는 현상이다. 다른 나라는 보통 외국인 노동자한테 혐오가 가는데 우리는 여성에게 간다. 그 출발점을 보니 중2~3학년이더라. 20대가 되면 이미 ‘완성형’이다. 사교육 문제를 다룬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보면 전교 3등까지만 나오고, 그 밑으로는 관심도 없는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실제 현실에서는 특목고에 가지 못하는 평범한 10대들은 대부분 게임으로 빠진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이들을 완전히 방치해놓고 있다. 20대의 문제를 풀려면 10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0대들에 대한 학교 교육 실패의 예로 중학생 때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을 들기도 했던데.
“중학교 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못 읽으면 평생 못 본다. 어른이 되면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감성이 메말라서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자기가 아는 것과 재미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책 한권을 다 읽는다. 전세계의 중학생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우리만 못 한다면 일상의 디자인이 잘못된 거다. 중학교 때 소설을 충분히 읽지 못한 채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다.”
1980년대 후반의 대학생이 대부분 그랬듯이 그 역시 ‘운동권’이었다. 대학(연세대 경제학과) 2학년 때인 1987년 6월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 도중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질 때 우석훈도 현장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3학년 때부터는 사회변혁을 꿈꾸는 민중운동에 뛰어들어, 버스기사 등을 상대로 밤에 노동법을 가르쳤다. 199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도 운동의 연장선이었다. 6년 만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활동과 녹색당에 가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금도 그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 좋은 국가를 만들고픈 꿈과 이상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어깨싸움 대신에 나부터 행복해지기”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삶에 대한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젊은 시절 좌우명은 ‘굵고 짧게’였지만, 지금은 ‘가늘고 길게’다. ‘가늘고 길게’의 의미는 “막 살거나 전향을 해서 거꾸로 사는 삶이 아니라 속도를 좀 늦추고 성과를 덜 기대하는 삶”(임시연습장)의 표현이다. 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대신에 ‘할 만큼 하고 안 되면 거기에서 멈추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집착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는 삶이다. 요즈음 그는 지인들에게도 늘 “살살 살라”고 말한다.
“나는 모두가 행복해야 진짜 행복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모두 행복해져서 나도 행복해지는 날이 죽기 전에 올지 어떨지 모르겠다. … 일하는 시간 내내 불행하다가 완전히 일을 놓고 나서야 행복해지는 것,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일단 내가 먼저 좀 행복해야겠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다려줄 수 있을 것 같다.”(<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페이스북에 “이제는 어깨싸움에서 빠져나왔다”는 표현을 여러번 썼더라. 자리를 놓고 사람들과 경쟁 또는 권력다툼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그런 게 재미가 없다. 솔직히 먹고살기 힘들다면 지금도 그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일찍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다.(대기업 다니던 시절 번 돈이 꽤 됐다.) 굽신거려가면서까지 무엇을 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고 나니까 다 내려놓게 되고, 그러니 시간 여유도 많아졌다. 긴 시간을 뭘 하고 지내나 생각하게 됐는데 보람있는 것과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고, 티가 안 나는 일이라도 하자고 결심했다.”
오후 4시30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향하면서 우석훈은 말했다. “학자로서 제자들을 기르지 못하는 점이 제일 아쉽다. 그러나 결국 학자는 책으로 남는다. 이탈리아의 실패한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나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 애덤 스미스도 책으로 기억되는 거다.”
아, 우석훈은 C급 경제학자가 아니라 A급 경제학자를 꿈꾸고 있구나. 학교도 ‘자리’도 멀리한 경제학자, 일상의 재미와 행복을 누리는 글쟁이,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교육철학을 지키는 아버지가 앞으로 내놓을 지적 생산물이 기대됐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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