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역대 정권 중 최초로 청와대에서 시민사회와 거버넌스 진두지휘
2004년 5월 탄핵정국을 거쳐 대통령 업무에 복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정 2기의 시동을 걸었다. 청와대 조직과 인사에도 변화를 줬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시민사회수석 자리를 새롭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민사회수석 자리에 앉을 인물은 당장 발표되지 않았다. 그해 5월 15일 청와대 인선 발표과정에서 시민사회수석은 공석인 채 남아있었다. 그리고 2시간 뒤, 보기 드물게 하루 두 차례나 인사 발표를 해가면서 청와대는 문재인 신임 시민사회수석의 청와대 입성을 알렸다. 민정수석으로 있다 물러난 지 석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시민사회수석실은 노 전 대통령이 정부와 민간부문 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해가는 ‘거버넌스(governance)’를 실현하려는 계획에서 만든 조직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탄핵소추로 인한 직무정지 기간에 탄핵 반대 촛불집회를 보고 국민들의 강한 참여 의지에 부응해 지지를 얻으려면 합의에 바탕을 둔 거버넌스를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이전까지의 정부와는 달리 정부가 주도하는 식의 정책 결정 구조를 벗어나 시민사회와도 긴밀히 협력하는 임무를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에게 맡겼다는 청와대 측의 설명이 뒤따랐다. 현 정부 들어 다시 화두에 오르고 있는 시민사회와의 거버넌스를 역대 정권 청와대에서는 최초로 진두지휘한 인물이 문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국정복귀 후 신설 수석
이전까지는 다른 영역에 비해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시민사회 영역을 통치의 한 파트너로 보고 전담 의사소통 창구를 만든 셈이다. 신설된 직책이지만 대통령과 정권 차원의 중요도는 결코 낮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가 비서실 조직 개편 후 조정한 내부 의전서열만 봐도 중요도는 드러난다. 정무수석이 없어짐에 따라 시민사회수석이 수석급에서는 가장 높은 서열을 차지했다. 노 전 대통령의 국정 복귀 이후 처음으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는 대통령의 오른쪽과 왼쪽 옆자리에 각각 김우식 비서실장과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이 자리잡았고, 이들과 같은 장관급인 박봉흠 정책실장과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이 그 다음 자리에 앉았았다. 차관급인 11명의 수석·보좌관들 가운데서는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이 가장 상석을 차지했다. 이어 김영주 정책기획수석, 이원덕 사회정책수석, 박정규 민정수석, 이병완 홍보수석 등이 자리잡았다.
사실상 시민사회수석실이 사회 현안과 갈등에 관한 청와대의 대표적 창구가 된 것도 수석실 내부 업무 분장을 보면 잘 드러난다. 1비서관실은 외교·안보분야, 2비서관실은 경제·산업분야, 3비서관실은 사회분야로 각각 담당을 나눠 활동하기로 했다. 당시의 대표적 사회갈등 현안이었던 주한미군 기지의 평택 이전 문제에 관해서는 1비서관실이, 원전폐기물 관리센터 건설에 관해선 2비서관실이, 새만금 사업과 한탄강댐 사업 검토 문제는 3비서관실이 각각 맡는 식이었다. 하지만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서 민원을 해결하는 인상을 최대한 피하며 ‘협치’와 ‘갈등관리’의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방향이었다.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은 당시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청와대가 갈등 해결의 주체로 직접 나서지 않는 게 원칙이며, 이는 각 부처와 국무조정실의 몫”이라면서 “청와대는 갈등 해결을 위한 제도적 틀이 정상 작동토록 하고 갈등 해결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시민사회수석으로 재직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듬해인 1월 20일 시민사회수석에서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시민사회수석으로 일한 기간은 7개월 남짓이었다. 문 수석이 “시민사회수석실은 예를 들어 새만금 사업, 원전센터 설립, 용산 미군기지 이전 등 국가적으로 중대한 갈등사안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직접 언급한 것과는 달리, 이 기간 시민사회수석실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현안은 경남 양산 천성산을 지나는 고속철도 터널 공사에 반대해 지율스님이 장기간에 걸친 단식을 벌인 일이었다. 문 수석은 단식 중이던 지율스님을 두 차례 찾아 법원의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공사를 중지하도록 당시의 건설교통부 등에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밝혔지만, 지율스님이 요구하던 환경영향평가 재실시에는 난색을 표한 바 있다.
7개월 재임, 지율스님 단식 중단 노력
지율스님은 문 수석이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인 2005년 2월 정부 측의 환경영향평가 재실시 약속을 받아내며 당시 네 번째 하고 있던 단식을 풀었지만, 2005년 9월 다시 단식에 들어가 100여일 동안 단식을 계속했다. 문 대통령과 지율스님 사이의 좋지 않은 관계는 2012년에도 이어졌다. 2012년 6월 당시 민주당의 대선주자로 부상하던 문재인 의원이 <운명>이라는 책을 통해 자신과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기 청와대에서의 이력을 밝히자 책 내용을 문제삼아 지율스님이 명예훼손 손배소송을 건 것이다. 법정으로 넘어간 문제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2013년 7월 “증거, 자서전의 문맥 등을 살펴보면 해당 부분이 아주 정확하게 기술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허위의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지율스님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이밖에도 문 대통령은 시민사회수석 시절 2004년 7월 경기도 평택의 주한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대책위원회 대표단과 용산미군기지 이전문제에 대해 면담하기도 했다. 평택 주민들뿐만 아니라 통일·평화 관련 시민단체들까지 나와 미군기지 이전을 전면 재검토해줄 것을 요구한 사안이었다. 향후 격렬한 충돌이 벌어진 결과를 감안하면 중대한 사인이긴 했지만 당시는 본격적인 기지 이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원칙을 강조한 문 수석이 의견을 굽히지 않음에 따라 양측의 논의는 평행선을 달리며 싱겁게 끝났다.
이어 행정수도 이전에 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림에 따라 문 수석과 시민사회수석실은 시민사회를 향한 설득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으로 접어들면서 청와대가 이기준 신임 교육부총리를 지명한 데 따른 인사문제 파동이 확대됐다. 이 부총리의 장남이 이중국적을 유지하다 한국 국적을 포기한 일이 도마에 올랐다. 문 수석은 신임 교육부총리 지명에 대한 교육분야의 시민사회 여론이 돌아서는 것을 막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이어진 인사에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며 시민사회수석으로서의 임무를 마무리했다.
<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2004년 5월 탄핵정국을 거쳐 대통령 업무에 복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정 2기의 시동을 걸었다. 청와대 조직과 인사에도 변화를 줬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시민사회수석 자리를 새롭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민사회수석 자리에 앉을 인물은 당장 발표되지 않았다. 그해 5월 15일 청와대 인선 발표과정에서 시민사회수석은 공석인 채 남아있었다. 그리고 2시간 뒤, 보기 드물게 하루 두 차례나 인사 발표를 해가면서 청와대는 문재인 신임 시민사회수석의 청와대 입성을 알렸다. 민정수석으로 있다 물러난 지 석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시민사회수석실은 노 전 대통령이 정부와 민간부문 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해가는 ‘거버넌스(governance)’를 실현하려는 계획에서 만든 조직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탄핵소추로 인한 직무정지 기간에 탄핵 반대 촛불집회를 보고 국민들의 강한 참여 의지에 부응해 지지를 얻으려면 합의에 바탕을 둔 거버넌스를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이전까지의 정부와는 달리 정부가 주도하는 식의 정책 결정 구조를 벗어나 시민사회와도 긴밀히 협력하는 임무를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에게 맡겼다는 청와대 측의 설명이 뒤따랐다. 현 정부 들어 다시 화두에 오르고 있는 시민사회와의 거버넌스를 역대 정권 청와대에서는 최초로 진두지휘한 인물이 문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2004년 8월 25일 당시 문재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경남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지율스님을 찾아 단식 철회를 권유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전까지는 다른 영역에 비해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시민사회 영역을 통치의 한 파트너로 보고 전담 의사소통 창구를 만든 셈이다. 신설된 직책이지만 대통령과 정권 차원의 중요도는 결코 낮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가 비서실 조직 개편 후 조정한 내부 의전서열만 봐도 중요도는 드러난다. 정무수석이 없어짐에 따라 시민사회수석이 수석급에서는 가장 높은 서열을 차지했다. 노 전 대통령의 국정 복귀 이후 처음으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는 대통령의 오른쪽과 왼쪽 옆자리에 각각 김우식 비서실장과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이 자리잡았고, 이들과 같은 장관급인 박봉흠 정책실장과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이 그 다음 자리에 앉았았다. 차관급인 11명의 수석·보좌관들 가운데서는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이 가장 상석을 차지했다. 이어 김영주 정책기획수석, 이원덕 사회정책수석, 박정규 민정수석, 이병완 홍보수석 등이 자리잡았다.
사실상 시민사회수석실이 사회 현안과 갈등에 관한 청와대의 대표적 창구가 된 것도 수석실 내부 업무 분장을 보면 잘 드러난다. 1비서관실은 외교·안보분야, 2비서관실은 경제·산업분야, 3비서관실은 사회분야로 각각 담당을 나눠 활동하기로 했다. 당시의 대표적 사회갈등 현안이었던 주한미군 기지의 평택 이전 문제에 관해서는 1비서관실이, 원전폐기물 관리센터 건설에 관해선 2비서관실이, 새만금 사업과 한탄강댐 사업 검토 문제는 3비서관실이 각각 맡는 식이었다. 하지만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서 민원을 해결하는 인상을 최대한 피하며 ‘협치’와 ‘갈등관리’의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방향이었다.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은 당시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청와대가 갈등 해결의 주체로 직접 나서지 않는 게 원칙이며, 이는 각 부처와 국무조정실의 몫”이라면서 “청와대는 갈등 해결을 위한 제도적 틀이 정상 작동토록 하고 갈등 해결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시민사회수석으로 재직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듬해인 1월 20일 시민사회수석에서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시민사회수석으로 일한 기간은 7개월 남짓이었다. 문 수석이 “시민사회수석실은 예를 들어 새만금 사업, 원전센터 설립, 용산 미군기지 이전 등 국가적으로 중대한 갈등사안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직접 언급한 것과는 달리, 이 기간 시민사회수석실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현안은 경남 양산 천성산을 지나는 고속철도 터널 공사에 반대해 지율스님이 장기간에 걸친 단식을 벌인 일이었다. 문 수석은 단식 중이던 지율스님을 두 차례 찾아 법원의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공사를 중지하도록 당시의 건설교통부 등에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밝혔지만, 지율스님이 요구하던 환경영향평가 재실시에는 난색을 표한 바 있다.
7개월 재임, 지율스님 단식 중단 노력
지율스님은 문 수석이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인 2005년 2월 정부 측의 환경영향평가 재실시 약속을 받아내며 당시 네 번째 하고 있던 단식을 풀었지만, 2005년 9월 다시 단식에 들어가 100여일 동안 단식을 계속했다. 문 대통령과 지율스님 사이의 좋지 않은 관계는 2012년에도 이어졌다. 2012년 6월 당시 민주당의 대선주자로 부상하던 문재인 의원이 <운명>이라는 책을 통해 자신과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기 청와대에서의 이력을 밝히자 책 내용을 문제삼아 지율스님이 명예훼손 손배소송을 건 것이다. 법정으로 넘어간 문제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2013년 7월 “증거, 자서전의 문맥 등을 살펴보면 해당 부분이 아주 정확하게 기술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허위의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지율스님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이밖에도 문 대통령은 시민사회수석 시절 2004년 7월 경기도 평택의 주한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대책위원회 대표단과 용산미군기지 이전문제에 대해 면담하기도 했다. 평택 주민들뿐만 아니라 통일·평화 관련 시민단체들까지 나와 미군기지 이전을 전면 재검토해줄 것을 요구한 사안이었다. 향후 격렬한 충돌이 벌어진 결과를 감안하면 중대한 사인이긴 했지만 당시는 본격적인 기지 이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원칙을 강조한 문 수석이 의견을 굽히지 않음에 따라 양측의 논의는 평행선을 달리며 싱겁게 끝났다.
이어 행정수도 이전에 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림에 따라 문 수석과 시민사회수석실은 시민사회를 향한 설득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으로 접어들면서 청와대가 이기준 신임 교육부총리를 지명한 데 따른 인사문제 파동이 확대됐다. 이 부총리의 장남이 이중국적을 유지하다 한국 국적을 포기한 일이 도마에 올랐다. 문 수석은 신임 교육부총리 지명에 대한 교육분야의 시민사회 여론이 돌아서는 것을 막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이어진 인사에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며 시민사회수석으로서의 임무를 마무리했다.
<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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