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1) 원칙인가, 독선인가

ngo2002 2012. 9. 4. 10:02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1) 원칙인가, 독선인가

ㆍ신뢰의 리더십 ‘선거 여왕’과 불통의 ‘수첩 공주’ 이미지 혼재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18대 대통령 선거 여당 후보로 선출됐다. 박 후보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는 등 ‘복지·통합’을 화두로 12월19일 대선을 향해 잰걸음을 옮기고 있다. 경향신문은 대선 후보들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에 앞서 지인들의 증언과 관련자료 등을 통해 박 후보의 삶과 정치 궤적, 제기된 의문을 되짚어보는 ‘박근혜 뒤집어보기’를 시작한다. 평가가 엇갈리는 정치 스타일과 정치관, 의문의 꼬리표가 붙어 있는 과거 및 가족, 도덕성, 정책적 변신의 과정, 5·16과 유신 등 과거사 인식까지 4개 분야로 나눠 짚어본다.

2004년 11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의원총회에서 김덕룡 원내대표 발언을 들으며 수첩에 메모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주변 사람을 딱 1m 바깥에 세워둬… 함께 넘어지는 일 없다”
“총선 뛰어보니 노소가 열광… 이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겠나”
“정치개혁 → 경제성장 → 복지… 여론 따라 달라지는 가치”
“발신번호 제한으로 전화… 폐쇄적 비밀주의가 소통 방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게 원칙과 명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감싸안아줄 사람이 아니다. 주변 사람을 자신의 딱 1m 바깥에 세워둔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다. 행여 그 사람이 넘어질 일이 생겼을 때, 함께 넘어지는 일은 없다.”

“총선을 뛰어보니 뛰어볼수록 참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믿게 된다. 20·30대 친구들은 연예인처럼 카메라를 들이대지,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은 손을 부여잡고 ‘대통령 되는 것은 보고 눈을 감아야겠다’고 말한다. 이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나.”

모두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와 가까운 의원들이 한 말이다. 주변 사람들과는 일정한 ‘보호 거리’를 유지하는 그가 국민 속으로 들어가면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정치인이 된다. 상반되는 두 이미지의 바탕에는 ‘명분’과 ‘원칙’을 강조하는 박 후보만의 소통 스타일이 자리 잡고 있다. 세종시 논란에서 보듯 그는 늘 “신뢰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밝혀왔다. 이런 그의 신념은 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박 후보에게 손을 내밀게 해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차갑고 어렵다’ ‘소통이 어렵다’ ‘독선적이다’라는 비판도 동시에 존재한다.

■ 원칙과 신뢰의 리더십과 이면

2004년 말 박 후보 별명은 ‘수첩공주’였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이른바 4대 법안을 두고 극한대치를 이어가던 때였다. 당시 당대표였던 박 후보를 비롯해 김덕룡 원내대표, 열린우리당의 이부영 당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4자 회담’을 열고 쟁점 법안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당시 여당 측 인사들은 회담 후 “박 대표가 수첩에 할 말을 적어와 그 말만 반복한다. 협상이 아니다.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고집으로 비치기도 하는 박 후보의 ‘원칙 정치인’의 모습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 위헌 결정에 따라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이 만들어질 당시 여야 합의를 한 만큼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박 후보다. 이후 2010년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며 끝까지 약속을 지켜내게 한 것도 바로 그 ‘원칙’이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경선룰을 둘러싸고 이명박 후보와 대치할 때 강재섭 대표의 중재안을 놓고 “우선 기본 원칙이 무너졌고, 둘째로 당헌·당규가 무너졌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무너졌다”고 말한 것도 박 후보다. “1000표 드릴 테니 만들어 놓은 원칙대로 하자”는 조롱은 이때 나와 유명세를 탔다.

“신뢰와 약속을 지키고 말보다 행동으로, 생각보다 실천이 중요하다”(2007년 6월 전북대 강연)는 박 후보의 스타일은 신뢰받는 정치인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해왔다. 당은 어려울 때마다 박 후보에게 손을 내밀었고, ‘구원투수’라는 별명처럼 박 후보는 당을 위기에서 구해냈기 때문이다. 그는 2009년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가 없으면 선진사회로 갈 수 없다”며 “특히 법치와 신뢰, 인권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중요하다. 그런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박 후보에게 ‘약속 = 원칙’이란 등식이 있다. 다만 원칙의 가치·내용보다는 약속이란 형식적 속성에 무게를 두는 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정치인의 약속은 국민과의 약속이란 논리구조를 배경에 깔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2010년 1월 정몽준 당시 대표와 벌인 ‘미생지신(尾生之信)’ 논전이다. 정 대표는 박 후보가 세종시 추진이 국민과의 ‘약속’임을 강조하는 점을 빗대, “미생이라는 젊은 사람이 애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많이 오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결국 익사했다”고 했다. 이는 세종시 수정안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박 후보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자 박 후보는 나흘 뒤 “이해가 안된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고, 그 애인은 진정성이 없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고 정면 반박했다.

이런 그에게 ‘신뢰’란 긍정의 이미지가 덧붙었지만, 2005년 말 결국 거리 투쟁으로 이어진 ‘수첩공주’라는 비판에서 보듯 정치인으로서 유연성 부족이란 한계도 동시에 보여줬다.


■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

박 후보의 어두운 면은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 두드러졌다. 당시 박 후보가 아닌 이명박 후보를 택한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박 후보는 참 반듯하고 훌륭하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바로 피드백이 오고 제안이 받아들여지는 맛이 없다. 대선을 치른다는 것은 ‘함께’한다는 것인데, 함께 도모한다는 느낌보다는 ‘시키는 일을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편한 사람이 좋았다.”

박 후보는 늘 부정하지만, 소통 부재라는 지적은 여전하다. 한 의원은 “뜻을 같이한다는 게 무엇이냐.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하고 때론 싸우고, 때론 동의하고 그런 거 아니냐. 그런데 박 후보는 그런 게 없다. 의례적인 덕담을 주고받는 수준이다. 질문도 하기가 싫더라”고 했다. 한 중진 의원도 “박 후보가 전화를 할 때면 ‘발신번호표시 제한’으로 하는데, 도대체 나를 믿는 건지, 아닌 건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캠프 구성 등을 앞두고 당 안팎 인사들이 ‘발신번호표시 제한’ 전화를 기다린다는 우스갯소리도 떠돈다.

지난해 말 정태근·김성식 의원 탈당 등이 이어지며 쇄신파가 당의 변화를 촉구할 당시 박 후보를 향해 나왔던 말은 “전화번호도 모르겠고,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특정 의원을 통한 ‘메신저 정치’를 두고 쇄신파 의원들 사이에서 ‘우리의 진의가 왜곡되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박 후보는 아무 말 없고, 그의 뜻을 전하는 의원들만 늘어나면서 소통 방식 자체를 놓고 비판이 나온 것이다.

또 다른 인사의 회고담은 스파이 소설 같다.

“박 후보 쪽에서 연락이 와 만나기로 해서 약속 장소로 갔다. 그런데 전화가 다시 와서 인근 다른 곳으로 오라더라. 그곳으로 갔더니 박 후보 측근이 있었다. 그 측근이 나를 데리고 또 다른 곳으로 가더라. 거기에 나 말고 다른 의원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 박 후보를 만났다. 무슨 작전을 하나 싶더라. 굳이 이런 식으로 만나야 하는가 싶고, 내용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비밀주의’식 소통 방식은 박 후보의 용인술과 맞닿아 있다. “2인자를 두지 않고, 칸막이만 둬 각자 몫만큼만 일을 하도록 한다”(한 측근)는 것이다. 이 점은 캠프 총괄본부장을 맡았던 최경환 의원의 조선일보 인터뷰에 잘 나타난다. ‘친박 진영이 폐쇄적이고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는 지적에 최 의원은 “과거에는 2인자를 두고 그 사람이 회의해서 결정했는데 후보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퍼져 있다. 한 파트는 다른 파트 일에 개입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 모르는 사이에 일이 정해졌다고 말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 후보는 한번 자기 사람이다 싶으면 쉽게 바꾸지 않는다. 그의 실무 보좌진 4명은 1998년 정계 입문 이후 줄곧 호흡을 맞춰왔다. 측근들 사이에서는 “명백한 잘못이 드러나기 전에는 자기 사람을 절대 내치는 일은 없다”는 말이 나온다. 친박계인 현기환 전 의원이 돈 공천 의혹에 휘말렸을 때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려보자”며 원칙적 입장만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5년 자신이 임명한 전여옥 대변인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빗대 “다음 대통령은 대학 나온 사람이 돼야 한다”고 했다가 역풍을 맞았을 때도 “당대표로서 대신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이고 ‘자르지’는 않았다.

2인자를 두지 않는 리더십은 역설적으로 종종 측근 의원들이나 인사들 간에 박 후보와 ‘지근거리’를 과시하는 애정 경쟁을 부르기도 한다. 한 친박 의원은 박 후보의 ‘용인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박 후보에게 누구를 소개하는 자리라고 치자. 나와 박 후보는 이미 알고 있고, 나머지는 낯선 사람들이다. 그럼, 박 후보는 나를 그냥 흘끗 보고 지나가고 나머지에게는 살갑게 대한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들이 그날로 박 후보 지지자가 된다. 자발적으로 박 후보를 따라다니며 ‘박 후보가 나를 지난번에 알아봤다’면서 다음번에 또다시 박 후보를 보러 현장에 나타나는 거다. 바로 이게 박 후보의 용인술이 아닌가 싶더라.” 애정 경쟁을 조장하는 용인술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인의 장막’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 친박계 의원은 “당내 의원들 사이에서도 2007년 캠프에 참여했던 사람이 아니면 박 후보에게 접근하는 게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박 후보 주변 사람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친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친박’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모른다”고 말했다. 2007년 캠프에서 일했던 김무성 전 의원과 유승민 의원 등도 박 후보와 의원들 사이의 ‘수평적 토론’ 필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박 후보의 한 측근은 “박 대표가 머리에 뿔난 사람이 아니다”라며 “다만 청와대에 어렸을 때부터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식이 남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지난 3월28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대한불교조계종 제13대 종정 진제 스님 추대법회에 참석한 뒤 주위로 몰려든 불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최초의 여성 대통령 도전

‘불통’이라는 지적이 나올 때 박 후보는 “국민 여러분이나 동료 의원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눈다. 어떤 때는 전화하다가 팔이 아플 정도다. 국민 여러분이 정말 불통이라고 생각하셨다면 당이 어려운 사정에 있을 때 (4·11 총선에서) 믿고 지지해 주셨겠나”라고 반문했다. 그가 말하는 소통의 대상은 당내나 정치권보다 ‘국민’에 찍혀 있는 듯하다.

국민을 위하고, 국민과 약속을 지키는 게 정치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박 후보의 생각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일종의 ‘명분’ 우선의 정치다. 2002년 정당 개혁을 외치며 탈당했을 당시에도 박 후보는 당장 자기와 함께할 사람들을 모으는 것보다는 명분을 강조하는 입장을 택했다.

그는 “사람보다 원칙이 중요하다. 제가 이야기한 정당 개혁을 같이하겠다는 분이면 어떤 분이든 같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친박 관계자는 “박 후보에게는 ‘자리’보다 ‘역할’이 중요하다. 자리를 가지고 딜(거래)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말했다.

‘명분’의 정치는 바탕을 국민 여론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는 ‘약속 = 원칙’의 고집스러움과 달리 정치적 가치·주장에선 계속 변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그의 화두는 ‘정치·정당 개혁’이었고, 2007년엔 경제성장과 법질서로 대변되는 보수의 가치였다. 2012년에는 이전 명분의 대척점에 있는 복지를 앞세운 통합이다. 매번 당시 야당이나 정치적 경쟁자의 화두와 유사했던 점은 묘하다. ‘시대정신’이란 설명이 따라붙지만, 박 후보 리더십이 여론의 변동에 민감한 특징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박 후보 리더십의 특징을 여성 리더십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당내에서 불통 얘기가 나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부 논리다. 남성 위주의 정치판에서 해왔던 물밑 타협을 박 후보는 일절 안 하기 때문에, 기존 정치문법으로 읽히지 않고 답답하다는 소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진영 밖으로 나오면 박 후보의 행동은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광폭 행보고, 여성 리더십이 힘을 발휘하는 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 후보가 실제 여성 감수성을 갖고 있느냐에는 반박 논리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자신의 책에서 “(박 후보의) 역사관이나 개인적 가치관도 당연히 부성 콤플렉스 영향권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고 썼다. 부성 콤플렉스를 가진 여성의 특징 중 하나로 “개인적, 여성적 삶이 소멸되며 외부 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여성적 역할을 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실제 “박근혜 후보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여성’이다. 주변에선 첫 여성 대통령 후보 같은 이야기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친박계 인사)는 전언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06년 사무총장이던 최연희 전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이다. 당시 당대표였던 박 후보는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들께 깊이 사과드린다. 절대 다시는 국민에게 지탄받는 언행이나 일이 있어선 안된다”고 말했으나, 경질은 하지 않았다. 이후 최 전 의원이 자진 탈당했다. 박 후보는 제명과 관련해서도 “국회 윤리위에서 결정할 일”이라고만 했다. ‘여성 문제’라는 감수성을 갖고 처리하지 않고, 보통의 추문처럼 처리했다는 것이다.

<이지선·강병한 기자 jslee@kyunghyang.com>


 

입력 : 2012-08-27 22:00:24수정 : 2012-08-27 23:55:36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2) 도덕성과 과거를 묻는다

ㆍ‘정수장학회·가족관계·최태민 미스터리’가 의혹의 쟁점들

“정수장학회(문제)는 노무현 대통령 정부 시절에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5년 내내 모든 힘을 기울였다. 잘못이 있었다면, 지난 정권 때 힘이 있었던 주체들이 하면 됐지 왜 지금 저한테 하라고 하느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지난달 10일 대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기자들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는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의혹과 무관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향해 제기된 과거 의혹에 대해 취해온 입장과 같다.

하지만 박 후보 진영에서조차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로 꼽는 게 있다. 정수장학회 문제다. 한 친박근혜(친박)계 의원은 “정수장학회 문제만큼은 내가 꼭 해결해 보고 싶다”고 했다. 최측근으로 ‘왕실장’이라는 별칭을 얻은 최경환 의원조차 언론 인터뷰에서 “(정수장학회) 최필립 이사장이 알아서 처신해주면 고마운 일”이라고 우회적으로 용퇴를 요구하고 있다.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논란은 이처럼 박 후보의 ‘지침’이 떨어지면 일사불란하게 통일된 의견과 주석을 덧붙이던 평소 친박계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박 후보를 둘러싼 이런저런 의혹 중에서도 정수장학회는 실체가 있고,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며,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 친박계 인사는 “박 후보를 둘러싼 도덕성과 역사관 문제의 결정체가 정수장학회 아닌가. 이것만 해결되면 모든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8월 공개된 고 김지태 삼화고무 사장 비망록 복사본에는 5·16 쿠데타 세력의 요구로 정수장학회 전신인 부일장학회를 헌납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박 “정수장학회 잘못 있었다면 벌써 끝장”… 야권선 “장물”
반환 소송 진행 중, 측근들은 최필립 이사장 용퇴로 해결 기대


▲ 지만씨 재산형성 과정, 올케 서향희 변호사 늘어난 수임 눈길
4촌내 40여명 친·인척, 최태민 목사 논란 대선 때 부담 가능성


■ 정수장학회 논란은 진행형

정수장학회는 5·16 군사 쿠데타의 산물이다. 전신은 부산 기업인인 고 김지태씨가 설립한 부일장학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2년 부일장학회를 헌납받아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5·16 장학회는 1982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따 ‘정수’장학회라고 이름을 고쳤다.

야당은 정수장학회를 ‘장물’(贓物)로 규정한다. 절도·강도·사기·횡령 등 불법으로 얻은 남의 재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 이사장 퇴진과 재단 재산의 사회 환원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박 후보는 “장물이고 여러 가지 법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재단이) 벌써 오래전에 끝장났을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법원은 1심에서 박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2월 김지태씨 유족이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낸 주식반환 청구소송에서 “강박행위는 인정되지만 제척기간(법률상 권리존속 기간)이 끝나 청구 이유가 없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당시 김씨가 의사결정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식을 증여할 정도로 강박이 심했다고 보긴 힘들어 증여를 무효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 후보는 1995년부터 10년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았다. 1998년 1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연봉으로 1억~2억3520만원씩 총 11억여원을 받았다. 1980년 이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산 이른바 ‘은둔 18년’과 정치권 초반 박 후보에게 나름의 자금원이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 검증청문회 당시 급여·섭외비 등 “연간 장학금의 10%가 박 후보에게 갔다는 주장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 후보는 “이사장으로서 써야 할 돈이 필요하다. 목적 사업비와 운영비의 비율이 8 대 2인데 (내 보수는) 운영비 2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나온 돈”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 세비와 이사장 급여·섭외비 등이 얽혀 소득세와 건강보험료 중 일부를 정산하지 않았다가 추후 납부한 점도 드러났다. 박 후보는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가 “공권력에 의한 헌납”이라고 결론을 내리자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유신 시절 박 후보 공보비서관을 지낸 최필립 전 리비아 대사가 이사장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 이사장은 최근까지도 공식적으로 자신과 자제 명의 등으로 박 후보에게 정치 후원금을 제공한 것으로 민주당 민병두 의원의 분석 결과 드러났다.

이런 점들이 박 후보 측근과 친박 원로들 사이에서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고 가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친박계 의원은 “직접적으로 박 후보가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말이 안되지만, 법원이 강압을 인정했고 역사 화해 차원에서라도 최 이사장이 좋은 결정을 해주면 좋다”고 말했다. 친박계 원로들은 최 이사장 퇴진을 전방위적으로 압박 중이다.

이 때문에 박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범야권 후보에게 밀릴 경우 정수장학회 해결을 ‘반전’의 카드로 꺼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박 후보로서도 12월19일 대선을 앞두고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 얽히고설킨 가족들의 그늘

박 후보는 2004년 동생 지만씨가 서향희 변호사와 결혼하자 미니홈피에 “(서 변호사는) 동생과 아주 잘 어울리는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라고 남겼다. 하지만 지난 22일 기자간담회에서 박 후보는 “(서 변호사가) 홍콩에 간 것도, (국내로) 돌아온 것도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말했다. 8년여 시간보다 먼 거리가 이들 사이에 놓여 있는 듯했다.

정치권에선 “박 후보의 최대 적은 바로 가족”이라는 말이 나돈다. 박 전 대통령은 5남2녀 중 막내이고, 육영수 여사는 1남3녀 중 셋째다. 박 후보의 4촌 이내 친·인척만 40여명이 넘는다. 이들의 이런저런 추문이 공개되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박 후보 사촌 오빠인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친박연합’을 만든 뒤 3500만원을 받고 시의원 공천을 준 혐의로 구속됐었다. 지난해 박 후보 5촌 조카인 박용수씨가 또 다른 5촌인 박용철씨를 채무 등의 이유로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벌어졌다.

박 후보의 가장 가까운 핏줄인 지만씨와 근령씨도 ‘정치적 우군’이 되기는커녕 부담이다. 1990년 육영재단 문제로 갈등을 빚은 근령씨와 박 후보는 ‘의절’한 상태다. 근령씨의 남편인 신동욱씨는 자신에 대한 청부살해 미수와 5촌 살해사건 배후로 지만씨를 지목,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최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박 후보 측 인사는 “5촌 살해사건은 법원 판결대로 지만씨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박 후보는 더욱 무관한 일”이라고 했다.

우려의 시선은 지만씨와 그 부인인 서향희 변호사로 쏠린다. 서 변호사는 결혼 후 지만씨와 함께 육영수 여사 추도식에 참석하곤 했지만, 지난 8월15일에는 지만씨 혼자 나타났다.

서 변호사를 둘러싼 의혹의 핵심은 그가 박 후보를 배경으로 활용해 법률 자문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2006년 신우 사외이사, 2007년 씨엔에이치 감사 및 인선이엔티 고문, 2009년 법무법인 주원 공동대표, 삼화저축은행 고문 및 서울시 의회 고문, 2010년 전국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 공제조합 서울지부 고문, 2011년 법무법인 새빛대표·미주제강 고문 등을 지냈다. 지만씨와 결혼한 이후 사건 수임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최근엔 2009년부터 3년간 삼화저축은행 고문변호사를 지낸 점이 논란이 됐다. 지만씨가 친구인 신삼길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이 검찰에 연행되기 2시간 전에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박 후보는 지난해 6월 이런 의혹들에 대해 “(지만씨) 본인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했으니 그걸로 끝난 것”이라고 정리했다.

지만씨의 재산축적 과정에도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전자용 산화철 생산업체인 EG 회장인 지만씨는 1989년 고 박태준 포스코 회장으로부터 현 EG의 전신인 삼양산업 부사장직을 받았다. 1990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게서 9억원을 빌려 회사 지분 74.3%를 인수하면서 대표이사가 됐다.

EG는 고속성장을 거듭하면서 지난해 말 재벌닷컴이 집계한 부자 서열에서 지만씨는 국내 336위에 올랐다. 재산은 589억원이었다.


■ 미스터리로 남은 최태민 목사

최태민 목사를 둘러싼 논란은 ‘미스터리’에 가깝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해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최 목사 수사파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항소이유서, 박 후보와 최 목사의 인터뷰,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 정도가 남은 자료들이다.

최 목사는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격된 뒤 박 후보와 만나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면서 총재로 취임했다. 이는 1976년 구국봉사단, 1978년 새마음봉사단으로 개명됐다. 중정 수사자료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했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이 자료에는 최 목사의 혐의만 44건이나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은 1977년 9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백광현 중정 7국장, 박 후보, 최 목사를 불러 ‘친국(직접 죄인을 심문)’했다.

이후 검찰 재수사설 등이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10·26 후 권력을 잡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최 목사를 조사한 후 강원도 군부대로 보낸 것뿐이다.

박 후보가 1983년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최 목사가 그의 곁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육영재단과 어린이회관 운영에 최 목사와 그의 딸 최순실씨가 개입해 이권을 행사한다는 의혹은 당시에도 제기됐다.

1990년 근령·지만씨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최 목사로부터 언니를 구출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박 후보는 2007년 검증청문회에서 “제가 아는 한도에서는 특별히 의혹이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지 않으냐, 저는 그렇게 알고 있다”고 최 목사를 두둔했다.

최 목사는 1994년 사망했지만, 그림자는 남아 있다. 최 목사 딸인 순실씨의 남편 정윤회씨는 박 후보의 1998년 정치입문부터 함께해 2004년까지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2007년 대선 경선에서도 ‘삼성동팀’이란 비선팀을 이끌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삼성동은 박 후보 자택이 있는 서울 삼성동을 지칭한다.

“정씨는 박 대표가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3, 4년 전까지만 해도 행사에 가면 가끔 마주쳤다. 공식적으로는 활동하지 않을 때라 정윤회가 몹시 민망해했다”(2007년 경선캠프 인사)는 전언도 있다.

이후 그는 박 후보와 공식적인 관계는 끊은 것으로 보인다. 친박계 핵심 의원은 “2007년 이후 정씨는 사라졌다. 알면 피곤하기 때문에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실제로 모른다”고 했다. 박 후보도 2007년 검증청문회에서 “(관계가) 없다”고 했다.

다만 정씨와 최순실씨의 재산 형성 의혹은 제기될 수도 있다. 최씨는 현재 서울 신사동과 역삼동에 150억원대 건물 2채를 보유 중이며, 정씨와 공동명의로 서울 역삼동에 40억원대 단독주택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재산을 놓고 과거 육영재단 재산을 빼돌리거나 각종 이권 개입으로 부당하게 취득한 재산이 대물림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박 후보 측은 “그들의 재산과 박 후보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 박근혜의 집과 돈

박 후보가 직접 돈을 받은 경우는 두 번이다. 박 후보는 1979년 10·26 직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으로부터 생계비 명목으로 6억원을 받았다.

박 후보는 2007년 검증청문회에서 “전 전 대통령 심부름을 왔다는 분이 만나자고 해 청와대 비서실로 갔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시다 남은 돈이다. 법적 문제가 없다. 생활비로 쓰시라’고 해 감사하게 받고 나왔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에서 탈당해 한국미래연합 총재가 됐던 박 후보는 2002년 한나라당과 합당하면서 김영일 당시 사무총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았다. 박 후보는 2007년 검증청문회에서 “복당해 중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그래서 사무총장에게 확인했는데 2002년 11월26일과 12월7일에 각각 1억원씩 2억원을 선거활동비 운영자금으로 받았다. 합당조건으로는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박 후보 재산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21억8104만원이다. 서울 삼성동 단독주택이 19억4000만원을 차지한다. 박 후보는 예금만 7815만원이고 주식은 없다. 박 후보는 청와대를 나온 뒤 4차례 이사했다. 10·26 직후 서울 신당동 집으로 돌아간 뒤 1982년 성북동 주택으로 옮겼다. 이 집을 팔아서 1984년 장충동으로 갔다가 1990년 지금의 삼성동으로 이사했다.

성북동 주택은 당시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전두환 대통령의 요청으로 지어주면서 무상 취득 논란이 일었다. 박 후보는 “신당동 집이 좁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신기수 회장이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분이니, 좀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으니 이사를 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있어서 받아들인 것”이라며 “법적으로 세금 관계나 모든 것을 알아서 하겠다고 했기에 믿고 맡겼다”고 말했다.

<강병한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


 

입력 : 2012-08-28 21:49:55수정 : 2012-08-29 00:26:18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3) 정책변화, 진화냐 말 바꾸기냐

ㆍ성장에서 복지로 ‘좌클릭’ 급변… 어떻게 납득시킬지가 과제

“규제를 풀어 세계의 사람과 자본이 한국으로 몰려들도록 하면 주가 3000 시대도 가능하다.”(2007년 4월11일 증권업협회 증권사 지점장 간담회)

“그동안 양적 발전이나 성장을 중요시해왔지만 이제는 질적 발전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2011년 12월4일 경향신문 김호기·이상돈의 ‘대화’ 인터뷰)

2007년 대선과 2012년 대선 사이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정책은 급격한 변화의 궤적을 그린다. 5년 전 ‘성장 담론’은 분배 쪽에 초점을 둔 ‘복지와 경제민주화’ 담론으로 ‘좌클릭’했다. 작은 정부론을 앞세워 감세를 주장했던 박 후보는 조세부담과 복지 수준의 접점을 찾기 위한 국민 대타협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증세 논란에 불을 댕겼다는 평가, 자기 책임하에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국민에게 떠넘겼다는 비판이 양존한다.

그는 2007년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 정책’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 변형판이라고 할 4대강 정책에는 입을 닫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종합편성채널 승인 등을 골자로 한 미디어법안은 ‘언론의 다양성’을 들어 반대하다가, 일부 내용이 손질되자 “이 정도면 됐다”고 찬성했다. 이에 힘입은 여당은 미디어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정치인의 철학은 ‘정책’과 그 정책을 담은 ‘법안’으로 표출된다.

정치인이 내세우는 정책을 살펴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과 지향점을 알 수 있다. 박 후보의 정책과 그 행보를 짚어봐야 할 이유다.

2007년 3월12일 한나라당 대선 주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가 서울 여의도 캠프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성장 담론 위주의 경제공약이 담긴 ‘근혜노믹스’를 발표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5년 새 급격한 정책 변화… 경제민주화 등 진보 의제 앞세워
친박선 “박은 복지론자… DJ·노에 반발 2007년 성장 경쟁”


▲ 미디어법 원칙 없이 찬성, 사학법 땐 ‘색깔’ 덧씌우기도
당시 원희룡 “박의 리더십, 과거 회귀적… 민생 등 주장 다 패션”


■‘줄·푸·세’에서 경제민주화로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은 성장 담론이 지배했다. 이명박 후보는 ‘7% 경제성장, 10년 내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 진입’을 골자로 한 ‘747 공약’을 내세웠다.

박근혜 후보는 이에 맞서 이른바 ‘5+2 경제성장론’을 주장했다. 5%는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고, 플러스 2%가 지도자 몫이라는 얘기다. 박 후보는 여기에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 공약을 내놓았다.

노무현 정부의 증세 주장을 ‘세금 폭탄’이라고 규정한 당시 한나라당은 규제를 최소화하는 작은 정부와 감세 주장을 펴왔다. 당 대표였던 박 후보는 2005년 참여정부를 비판하면서, “현 정부는 규제를 더 강화하고, 세금을 더 많이 거둬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서민만 더 큰 고통에 처했다”며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무시하고 시장의 생리와 사람들의 본능을 무시하는 아마추어식 발상이 국민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박 후보는 2004년 8월4일 MBN에 출연해 “대한민국이 투자 기피국이 되고 있고 한국 경제가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좌파적인 정책과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2006년 1월2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저와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작은 정부와 큰 정부, 감세와 증세 어느 것이 선진 한국으로 가는 길인지 밝히고 국민 선택을 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2012년 박 후보 입장은 크게 달라졌다. 진보 진영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복지’ 키워드를 자신의 것처럼 가져왔다. 생애주기별 복지정책 구상을 담은 사회보장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출마선언문에서 가장 눈에 띄게 내세운 것도 ‘경제민주화’ 구상이다.

박 후보의 변화는 2009년 스탠퍼드대학 연설에서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언급한 뒤부터 시작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성장의 온기가 골고루 퍼지지 못했고, 그 때문에 성장보다는 분배 쪽에 초점을 두도록 정책기조의 변화가 필요했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2011년 3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에서 박 후보는 “성장이 전체 국민의 후생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효과는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며 “성장이 전체 후생에 골고루 도움이 되기보다는 일부에 편중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박 후보 변화의 시작은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고 말한 200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 때라는 분석도 있다. 한 친박 핵심 인사는 “돌이켜보면 박 후보는 ‘성장’보다는 ‘복지’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2007년 경선 때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발이 컸기 때문에 성장 경쟁을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박 후보가 과거와는 생각 자체가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감세’를 고집해오던 입장은 ‘증세 논의를 열어두자’는 쪽으로 변했다. 박 후보는 지난달 22일 기자간담회에서 “복지비용의 60%는 세출을 절약하고, 40%는 세입을 늘려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과 (비용의) 조달 수준의 접합점을 찾겠다”며 “국민 대표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공청회를 하고 국회에서 논의도 해서 우선 순위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정책의 진화’냐, ‘말 바꾸기’냐

박 후보는 정책 변화를 ‘변화’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는 7월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 ‘줄·푸·세’와 ‘경제민주화’가 배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줄·푸·세에서 경제민주화로 바뀐 것은 경제상황이 바뀐 것이냐, 경제철학이 바뀐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박 후보의 대답은 이랬다.

“ ‘줄’은 저소득층, 중소기업 세율을 내리자는 것이고, ‘푸’는 규제의 불필요한 것을 풀어 국민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것, ‘세’는 법치를 바로 세워 공정거래와 경제 남용을 바로잡자는 부분이다.”

하지만 2007년 ‘줄·푸·세’를 주장할 당시 ‘줄’은 주로 법인세 인하 등 대기업에 혜택이 가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다. ‘푸’는 “기업의 의욕을 북돋우고 기업의 자율을 최대한 확대하자”(서울 파이낸셜포럼 특강)는 규제 완화에 강조점이 찍혔다. 지난달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경제적 지배력 남용에 있어서는 규제가 필요하지만 쓸데없는 규제가 많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세’이다. 2007년 박 후보는 “법 위에 떼법이 존재해서 폭력을 쓰고 우기면 된다”며 파업 등 노조 활동을 겨냥한 바 있다.

박 후보의 ‘입장이 변화한 것이 없다’는 발언은 외부적으로 “일제강점과 8·15 독립이 같다는 말”(노회찬 의원)이라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캠프 내부에서도 “경제 상황이 2008년 이후 급속하게 바뀌었고 2009년부터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꾸준히 말해왔으니 변화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캠프 핵심 관계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성장에서 복지로, 국가에서 국민으로 담론이 변화했다는 것이 박 후보 소신이라면, 이전에 했던 주장이 어떤 이유에서 어떻게 진화됐는지 설명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 후보와 새누리당에 경제민주화 실천 의지가 있느냐는 의구심도 나온다. 4·11 총선에서는 당의 정강·정책에 담았던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인물을 공천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제기됐다. 현재도 박 후보 주변에서는 “경제민주화는 선거전략인 측면이 많다. 지금 언론에 경제민주화란 의제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뜨니까 더 많이 부각됐는데 실제로 박 후보를 만나서 들어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강한 입장은 아닌 것 같다”(한 의원)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특히 박 후보보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경제민주화라는 의제에 동참해줄지도 의문이다. 원내외 40여명이 경제민주화 실천모임을 꾸려 관련 법안을 시리즈로 내고 있지만, 모임 내부에서는 “당내 설득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 박 후보의 입장이 궁금한 정책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 후보가 주장하거나 반대한 정책들 중 여전히 입장이 모호한 것들도 있다. 박 후보는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정책을 두고 당시 정책 청문회에서 “아버지 시절에도 검토했다가 폐지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대에도 그랬다. 그래도 계속 추진할 것이냐”고 묻는 등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운하 정책의 변형인 4대강 정책을 두고는 별다른 입장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제가 분명히 대운하는 반대라고 일관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4대강은 대운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밝혔으니 믿어야 할 것”이라며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국민을 속이는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만 말했다.

‘열차 페리’ 공약도 설명이 없다. 한·중 열차페리 정책은 복합화물운송 시스템으로 육상에서 화물을 실은 열차를 고스란히 페리에 실어 수송하는 방식을 말한다. 박 후보 쪽에서는 당시 중국 옌타이항~다롄항 구간 시험운행 등 증명된 사례가 있고 기존 중국 횡단철도와 연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정책’에 비해 현실성이 높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현재 공약에서 이 부분은 빠져 있다.

박 후보가 납득되는 설명 없이 입장을 바꾼 사례로는 2009년 미디어법도 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은 종편 승인 등을 골자로 미디어법 제정을 추진했다. 박 후보는 “제대로 된 미디어법이 되려면 미디어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고 독과점 문제도 해소돼야 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강행 처리 땐 반대표를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이런 입장을 밝힌 지 불과 일주일여쯤 지나 언론 관련 법안이 본회의에서 직권상정으로 처리될 당시 박 후보는 “이 정도면 국민도 공감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강행 처리된 법안은 구독률 20% 이상 신문사의 방송 진출을 불허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중앙·동아일보의 구독률은 그보다 낮았고, 결국 이들 신문사의 종편은 출범됐다.

박 후보 쪽에서는 “그나마 25%였던 기준을 박 후보가 버텨 20%로 낮췄다”는 설명뿐이었다. 당시 박 후보 측근 사이에서도 “박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인 원칙 정치에 타격을 입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앞서 대표 시절인 2004년 말부터 여야 대치의 주요 법안이었던 신문법 개정안에 반대한 박 후보는 “시장점유율 규제 조항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 때는 ‘국제적 기준’과 ‘자유시장 경제’를 앞세웠던 것이다.

19대 국회에서 또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이는 사립학교법 개정에도 박 후보가 깊숙이 개입했다. 2005년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주도로 개방이사제 도입과 인사위원회 권한 강화, 부패사학에 임시이사 파견제 등을 내용으로 한 사학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박 후보는 이른바 ‘사학법 투쟁’을 하며 거리로 나갔다.

박 후보는 당시 사학법에 ‘색깔’을 입혔다. 그는 “그들(정부와 여당)의 목표는 비리척결이 아니라 전교조에 사학을 넘겨줘서 지배구조를 바꾸고 아이들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2006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후보는 “이번에 날치기한 사학법은 전교조가 10년 전부터 주장한 법이다. 이 법의 독소조항인 개방형 이사제, 임시이사제, 교사의 노동운동 허용 같은 것은 모두 전교조 숙원 사업이다. 전교조가 사학의 경영에 간섭하고 갈등을 일으켜 이사회를 장악하고 학교를 접수하는 길을 터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박 후보를 향해 원희룡 당시 최고위원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이념적 편견은 병”이라고 밝혔다. 2007년 개방형 이사제 추천 조항 등 일부 내용을 수정해 사학법이 재개정되긴 했지만 여야 모두 이 법안에 불만을 갖고 있다.

다시 원희룡 전 최고위원 말로 돌아가보자.

“박 대표가 사학에 개방이사를 넣는 것은 빨갱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김정일도 만나고 이념적 지평이 넓다고 말하는 것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와 같다. 자기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박 대표의 리더십 밑바닥은 과거회귀적·대결적·관념적 이념 틀이고, 민생 등 나머지 주장은 다 패션일 뿐이다.”

실제 보수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직접 면담한 이가 박 후보다. 박 후보는 자서전에서 2002년 5월13일 백화원 영빈관 회의실에서 이뤄진 김 위원장과의 독대에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금강산댐 남북 공동조사단 구성 등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현재 박 후보는 대북·안보 정책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설명되는 포용정책과 압박정책의 중간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6·15 공동선언, 10·4 선언도 존중한다는 입장이다.

<이지선·강병한 기자 jslee@kyunghyang.com>


 

입력 : 2012-09-02 22:03:57수정 : 2012-09-02 22:03:57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4) ‘대통령’과 ‘대통령 딸’의 갈림길에 서다

ㆍ여전히 변함없는 ‘5·16, 유신 인식’… 최종 입장 정리 뭘지 주목

2007년 7월19일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청문회가 열린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당 국민검증위원회 위원 보광 스님과 박근혜 경선 후보 간에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박 후보는 육영재단에서 나오는 1990년 잡지 인터뷰에서 ‘5·16과 4·19 뜻을 계승하고 3·1운동과 6·25 등에 연결시키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3·1운동과 5·16을 같이 연결시킬 수 있는지, 후보의 역사의식에 대해 상당히 의문이 갑니다.”(보광 스님)

“저는 5·16은 구국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남북 간 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우리가 흡수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혁명공약에 보면 ‘기아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하고’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국민들이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구국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박근혜 후보)

이 장면을 기억하는 2007년 박 후보 캠프의 한 인사가 전한 당시 상황은 이렇다.

“ ‘구국의 혁명’이라는 이야기는 준비된 내용에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에 우리가 보고한 것은 ‘2차대전 뒤 독립국 중에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게 전부였다. 캠프서도 이 부분을 여러 차례 후보에게 주지시켰다. 그런데 검증 위원이 박 후보를 몰아붙이니 그렇게 대답한 것 같다. 박 후보가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참모들 보는 표정이 마치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 선생님을 보는 듯했다.”

5년이 지나서 지난 7월16일 박 후보는 대선출마 선언 직후 첫번째 토론회인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 군사 쿠데타를 두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주변 인사들은 “5년 전엔 딸로서 박 전 대통령을 대했다면, 이제는 앞선 세대의 정치지도자로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박 후보의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박 후보는 5·16을 혁명이라고 기술한 대안 교과서를 만든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박효종 서울대 교수를 캠프에 포함시켰다. 후보 자신도 “(5·16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내 발언에 찬성하는 국민이 50%가 넘는다”고 했다. 보수 진영에서조차 지도자의 역사인식이 헌법정신에서 벗어난다는 비판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왼쪽)가 지난해 8월27일 경북 청도군 신도리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2007년 “5·16은 구국의 혁명” 2012년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역사인식, 정치 입문 전과 같아… 보수도 “헌법정신 위배” 비판


▲‘대통령의 딸’ 이미지를 넘어 대선 후보로서 홀로서기가 숙제
측근들 인식도 문제… “미래로 가자”며 민생 강조만으론 부족


■ ‘역사에 맡기고 미래로?’

박 후보는 2007년 이전에도 줄곧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해왔다. 10·26으로 청와대에서 물러난 뒤 모습을 감췄던 그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박 후보는 박 전 대통령과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일을 앞세워 공개행보에 나섰다. 1989년 5월19일 MBC 인터뷰에서 박 후보는 “5·16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저는 5·16이 말하자면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어떻게 군인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느냐, 또 헌정을 중단시켰다,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이런 식으로 비판 일변도로 나오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럼 과연 5·16이 없다, 더 나아가서 그 후에 있은 유신이 없다고 할 때 5·16을 비판하고 심지어 매도까지 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땅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나라가 없어지는 판에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 하는 얘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이해가 안됩니다. 나라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는 거니까.”

남북 대치 상황을 고려할 때 5·16과 유신이 없었으면 ‘남한도 공산화됐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는 박 후보의 역사인식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다. 북한을 바라보는 박 후보의 인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예는 또 있다. 1979년 10월27일 새벽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 서거 사실을 알리자, 박 후보는 “휴전선은 괜찮으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계원 실장이 증언한 바다.

2002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도 박 후보는 아버지를 옹호했다. 박 후보는 “아버지의 선택이 그 당시 국가지도자로서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버지 시대에 피해를 보신 분들에겐 마음 아프게 죄송하게 생각한다. 요즈음 여론조사를 보면 많은 분들이 그 시절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박 후보의 인식은 청와대에서 나와 정치권에 입문하기까지의 18년,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예 선양 활동에 집중했던 시기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청와대에서 나온 박 후보는 추모사업회를 설립하고 <조국의 등불>과 같은 기록영화를 만드는 등 추모활동을 집중적으로 벌였다.

그는 앞서 언급한 MBC 인터뷰에서 ‘왜 그동안의 침묵을 깼느냐’는 질문에 “그동안 아버지, 특히 아버지가 하신 일에 대해, 제가 판단하기에는 왜곡된 여러 평가와 보도를 접하면서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며 “부모님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하나라도 바로잡는 것이 자식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싶어 (언론 인터뷰에) 적극 응해왔다”고 말했다.

1989년 11월5일 일기를 보면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 그것도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고,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고 적기도 했다.

‘아버지의 딸’이라는 강한 정체성이 대통령 후보라는 ‘공인’의 정체성을 뒤덮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주변에선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포은(정몽주)에게 물으면 역성 혁명이라고 하겠지만, (손자인) 세종대왕에게 물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박 후보도 세종대왕과 같은 입장 아니겠느냐”(홍사덕 전 캠프 공동선대위원장)는 변호도 나온다. 하지만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정치인 박근혜’로서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끊임없이 나온다.


역사인식을 놓고 비판이 제기될 때 박 후보는 요즘 “그것은 역사 논쟁의 영역이다. 우리는 민생에 신경쓰자”고 말한다고 한다. 그는 지난달 20일 대선 후보 확정 후 기자 간담회에서 “5·16에 대해 오랜 몇 년간 혁명이라고 교과서에 나온 적도 있고, 군사정변이라고 한 교과서도 있고, 쿠데타라고 한 교과서도 있다. 국민 생각이 다양하다”며 “정치권에서 그러면(문제화하면)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 아닌가. 누가 강요할 수도 없다. 정치권에서 해야 할 일 뒤로 제쳐놓고, 민생도 제쳐놓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를 두고 한 당내 인사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옳지 못한 사람으로 편가르기하고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주변 인사들의 역사인식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 후보 경선 캠프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홍사덕 전 의원은 지난달 29일 “유신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달러를 못 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유신시대에 고통받은 사람에게 사과하고 유감도 표하고 그거야 당연히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강조점은 “유신의 다른 측면”에 찍혀 있다. 홍 전 의원은 “1971년도까지 10억달러 수출을 하다 1977년 100억달러를 달성했는데 조선·자동차·석유화학공단 등 큰돈이 들어가는 산업을 하려면 권력 집중 같은 것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포은과 세종대왕론’과 마찬가지로 박 후보의 역사인식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도 풀이된다.

박 후보 측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자 새누리당에 관여했던 한 외부 인사는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지적했는데 전혀 변하지 않는 박 후보 진영의 모습에 정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새누리당에 관여했던 내 심정이 이런데, 아무리 통합을 한다고 말을 한들 중도에 있는 국민이 마음을 열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과거와의 화해 어디까지 갈까

박 후보가 유신 피해자들에게 화해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0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해선 “아버지 (집권)시절에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했고, 2007년 장준하 선생 부인인 김희숙씨를 방문하기도 했다. 2012년엔 과거 정치적으로 반대했던 세력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듯 대선 후보로서 첫 행보로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역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하지만 진짜 과거와의 화해를 원하느냐를 두고는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말도 나온다. 2007년 박 후보가 장준하 선생의 유족을 만나러 갈 당시 한 참모는 박 후보가 내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전한다. “박 후보와 부인 두 분이 앉을 공간밖에 안 나올 정도로 좁은 곳이라 서로 인사를 하면서 머리를 살짝 부딪쳤는데, 그런 이후에도 두 분 다 말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아직 준비가 안돼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최근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이 다시 제기되는 것을 두고도 박 후보는 ‘정치적 의도’를 먼저 의심하는 분위기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도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몇 년간 조사했다. 그 전 정권에서도 했고 또 조사할 게 있다고 하면 해야겠다”면서도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 정치권이 미래로 나갔으면 좋겠다. 계속 과거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것만 옳으니 그르니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할 여유가 우리 정치권에 있나”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과거사 논란이 생길 때마다 색깔론이나 정체성 논란으로 대응해왔다. 참여정부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 등을 두고는 “간첩이 민주인사로 둔갑하고 간첩이 군 장성을 조사하는 잘못된 일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야당이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고 말했다. 2007년 6월19일 대선 경선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정책비전 대회에서 원희룡 후보는 “기회될 때마다 유신 피해자에게 사과한다고 했는데 인혁당 사건 희생자 가족 등이 만남을 요청하면 응할 의향이 있나”라고 물었다. 박 후보는 “제가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순수하게 헌신한 분들인데, 또 한 부류의 세력이 있고 이들은 친북의 탈을 쓰고 나라의 전복을 기도한 사람”이라며 “이는 분명 잘못된 것 아닌가. 이것이 혼동되면 진심으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

박 후보의 근본적인 역사인식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심은 박 후보가 5·16 쿠데타 재평가에 돌입할 것인가 여부에 쏠린다. 이미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 포럼’이 주체가 돼 5·16을 혁명으로 규정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펴냈다. 박 후보는 2008년 5월 이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뜻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과거를 다 덮고 미래로 가자’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박 후보 주장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사례에서 보듯 역사 다시 쓰기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우려를 의식한 탓인지 박 후보 주변에서 과거사 관련 행보를 두고 ‘결국 관건은 진정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측근은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했고 화해 행보를 시작했는데 유신의 피해자들도 못 만날 이유가 없다. 다 함께 갈 것”이라며 “문제는 박 후보의 진정성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될 것이고 그걸 두고 여러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 출발선에서 박 후보의 과거사 정체성은 분명 ‘대통령의 딸’이었다. 지금은 그것과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 사이, 어디쯤엔가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최종 선택의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시리즈 끝>

<이지선·강병한 기자 jslee@kyunghyang.com>


 

입력 : 2012-09-03 21:58:26수정 : 2012-09-03 21:5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