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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Knowledge <108> 터키 문화수도 이스탄불서 만난 역사 [중앙일보]

ngo2002 2010. 3. 19. 15:26

2009.11.30 08:13 입력 / 2009.11.30 09:43 수정

위대한 건축물이 증언하는 1453년 동로마제국 ‘최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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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터키 이스탄불은 문화재 정비·복원 작업으로 생기가 넘칩니다. 2010년 유럽의 문화수도 중 하나로 지정됐기 때문입니다. 556년 전 오스만 튀르크에 점령되기 전 이곳은 콘스탄티노플로 불렸습니다. 동로마제국의 심장이자 유럽의 문화수도였지요. 문화의 용광로 이스탄불에는 콘스탄티노플도 녹아 있습니다. 문화수도로 돌아온 콘스탄티노플을 찾아 떠났습니다. 시계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벌어진 1453년 4~5월로 맞췄습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증언하는 역사 현장 네 곳으로 안내합니다.

글·사진= 정용환 기자


이스탄불은 동로마 최후의 날을 보여 주는 유적들이 즐비한 곳이다. 1453년 동로마제국은 역사가들로부터 ‘잘 익은 감’ 으로 표현돼 왔다. 곧 떨어질 날만 남겨 둔 감처럼 동로마의 심장 콘스탄티노플의 운명도 시간 문제였다.이미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주변을 장악했기에이 도시는 육지의 섬, 물 위의 기름방울 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이 성은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견고하기로 유명한 삼중벽과 금각만이라는 천혜의 지리 조건 때문에 난공불락으로 통했다. 해군력이 우세한 기독교군은 금각만을 철쇄로 봉쇄하고 수비 병력을 서쪽 삼중벽에 집중시켰다. 오스만의 정복자 술탄 메메트 2세는 4월4일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들어간다. 문명의 충돌이 시작됐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었던 이스탄불 유럽지구 구(舊)도심에서 바라본 갈라타 탑. 금각만에 접한 갈라타 탑 주변 지역은 동로마제국 시절 제노바인들의 무역 거점이 있었다.

갈라타 탑

튀르크군 전선의 상륙작전을 지켜보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한창이었던 1453년 4월22일. 콘스탄티노플의 북쪽 금각만 건너에는 제노바 거류구가 있었다. 요새화된 이 지역의 상징인 갈라타 탑을 뒤로 돌아 튀르크군의 작전이 시작됐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역사적 의미 못지않게 이 전쟁을 후세에 각인시켜 준 함대 상륙작전이었다. 배가 산으로 간 사건이었다.

메메트 2세의 지휘 아래 72척의 크고 작은 전선이 나무 레일을 따라 보스포루스 해협 톱하네 해안에서 언덕으로 끌려 올라왔다. 웃통을 벗은 수천 명의 군사와 수백 마리의 소가 동원됐다. 작전은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금각만으로 진입한 오스만 해군의 등장으로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공방전의 추는 미세하게 기울기 시작한다. 병력이 크게 부족했던 기독교군에게 두 개의 전선은 한계 상황이 임박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갈라타 탑에 있던 제노바인들은 이 작전의 목격자였다. 중립을 표방해 겉으론 방관했지만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가 무너지는 현장이었다. 신음 소리가 탑 안에 메아리 쳤다.

10월24일 오전 이스탄불 유럽 지구의 신시가지에 우뚝 서 있는 갈라타 탑을 찾았다. 이 탑은 높이가 70m에 달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금각만을 조망권에 둔다. ‘바다의 용병’으로 명성을 떨쳤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함대가 금각만을 들락거리면서 튀르크 해군을 저지했던 세 개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선형 계단으로 꼭대기에 올라가도록 설계됐다. 7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3개 층만 걸으면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루멜리 히사르
동부 유럽의 기독교 지원군을 막아라


메메트 2세는 한 해 전부터 치밀하게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성패는 성벽 공략 못지않게 기독교 세계의 지원군을 적절히 차단하느냐는 문제와도 직결됐다. 당시 서유럽의 동쪽 경계는 헝가리였다. 흑해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내려오는 동부 유럽의 지원군을 견제하기 위해 메메트 2세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700m까지 좁혀지는 지점에 요새를 세우도록 명했다. 루멜리 히사르(유럽의 요새라는 뜻)였다. 59년 전 해협 건너편에 세워진 아나돌루 히사르(아시아의 요새)와 함께 해협을 포격 사정권에 둔 전략 요새였다. 1만 명도 안 되는 기독교측 방위군이 16만 명의 튀르크군을 맞아 분전했지만 지원군이 올 것이란 희망을 거세당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저항 강도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가지 위의 감’은 위태로웠다.

25일 오후 갈라타 탑에서 약 7㎞ 떨어진 루멜리 히사르에 도착했다. 20TL이 넘는 다른 유적지에 비해 저렴한 관람료(3TL·2300원)에 놀라며 들어섰다. 이 요새는 경사진 언덕 지형을 따라 세 개의 원형탑과 성벽으로 이뤄진 성채다. 여기가 해협의 개미허리에 해당하는 지점이라는 것은 요새 북쪽에 세워진 제2 보스포루스 대교를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다에 바짝 붙어 축조된 이 공격형 요새는 콘스탄티노플 전쟁 이후 흑해에서 남하하는 적이 없어 비워 두다가 16세기 이후 감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3중 구조 철옹성, 8m짜리 대포에 뚫리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마지막 날을 그림으로 재현한 파노라마 박물관 내부(사진 위). 박물관 옆에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그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동로마제국이 중과부적의 병력으로 56일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철옹성으로 불리던 테오도시우스 성벽 때문이었다.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2세가 5세기 중엽 세운 이 성벽은 금각만~마르마라해까지 육지 쪽 6㎞를 돌아 금각만과 마르마라해를 연결했다. 육지 쪽 성벽은 3중 구조였다. 내외 성벽에는 40m마다 높이가 10~20m에 달하는 공격용 사각탑이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었다. 400개에 달했다고 한다. 성 밖에는 폭 15m가 넘는 해자와 방책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제국의 수도를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이 머리를 짜내 만든 옹골찬 구조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성벽은 우르반이라는 헝가리인이 만든 8m짜리 거포 앞에 뚫리고 만다. 포탄 중량만 600㎏이 넘는 괴물이었다. 수백 발의 포탄을 맞고 외성벽이 깨지고 내성벽이 허물어졌다. 5월 29일 운명의 날, 성문 하나가 무너지자 그곳으로 튀르크 병사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이날 오후 내성벽의 탑에 동로마제국을 상징하는 쌍독수리기가 내려지고 붉은색 바탕의 초승달 깃발이 나부꼈다.

23일 오후 아타튀르크 공항 인근에 자리한 테오도시우스 성벽 유적 보존지에 들어섰다. 포탄에 맞아 깨진 사각탑이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를 지키며 그날의 비애와 환호를 증거하고 있었다. 한때 해를 가릴 정도로 거대했다는 이 구조물은 시간의 더께가 쌓여 이제는 애잔한 감상을 전한다. 네덜란드에서 온 한스 드 루스(55·교사)는 “화려했던 로마제국의 유적보다 허망한 끝을 보여 주는 이 성벽이 더 끌린다”고 말했다. 설탕의 맛이 달고 식초가 시큼하듯이 역사에 맛이 있다면 쓸쓸함일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이 성벽만큼 역사의 맛을 전해주는 곳도 없을 것 같다. 도로를 따라 이어진 이 성벽은 이스탄불 여행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아야 소피아 성당
패배의 상처, 기독교 상징에서 모스크로


점령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메메트 2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야(聖) 소피아 성당이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건축물은 동로마의 상징이었다. 메메트 2세도 벽면의 모자이크화가 쏟아 내는 색채의 향연에 잠시 넋을 잃었다고 한다. 1204년 4차 십자군전쟁 때 이곳을 약탈한 베네치아군이 성물을 모두 휩쓸어 가 파괴될 성물은 없었다. 메메트 2세는 성당을 이슬람교의 성전인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명했다.

21일 여행의 첫 행선지로 콘스탄티노플의 랜드마크, 아야 소피아 성당을 택했다. 360년에 봉헌된 아야 소피아 성당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불타고 무너졌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16세기 오스만제국의 술레이만 1세는 벽면의 모자이크화를 우상이라며 회반죽으로 덮어 버렸다. 그 모자이크화(사진)가 1932년 미국인 토머스 위트모어에 의해 벗겨졌다. 남쪽 계단 서쪽 벽에 있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세례자 요한의 모자이크화는 이 박물관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을 받치지 않고 세워 올린 중앙돔의 높이가 56m에 달한다고 한다. 인류의 보배를 이교도 술탄도 아껴 준 것이다. 2층의 기둥에 기대 앉아 엽서를 꺼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문명이 만나 공존의 모범을 보여 준 이곳에서 넘치는 감흥을 억누를 수 없었다.

참고서적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스티븐 런치만
『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
『인류문명의 박물관 이스탄불 기행』, 진순신
『종횡무진 동로마사』, 존 J 노리치

이스탄불에서 또 뭘 볼까

거대한 향신료스카프 시장
화려한 술탄의 궁전


이스탄불은 세계 5대 관광지로 꼽힌다. 지난해 2600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 역사 유적 말고도 유사 이래 동서양이 교직하면서 수많은 볼거리를 낳았기 때문일 것이다. ‘산해진미(美)’ 가득한 이스탄불의 명소들을 소개한다.

● 그랜드 바자르(시장)동양에서 실어온 온갖 향신료가 이곳에 모였다. 요즘도 서구에서 발간되는 요리책에는 터키 음식을 세계 3대 음식의 반열에 올리곤 한다. 향신료 요리의 메카였던 이스탄불이 아직도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동양에서 들여온 각종 염료로 염색의 향연을 연출하는 스카프 시장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 파노라마 박물관 거대한 돔 형태의 벽면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마지막 날을 파노라마 그림으로 재현했다. 돔 안으로 들어가면 쩌렁쩌렁한 포탄 소리와 진군을 독려하는 오스만군의 나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실감나는 화면과 음향은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하다.

● 보스포루스 해협 크루즈·해안 산책로 아시아·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크루즈다. 해협 양안으로 동로마와 오스만 튀르크 시대에 건축된 요새·궁전, 그리고 요즘 지은 고급 별장촌이 이어진다. 아시아로 건너가 유럽을 바라보며 터키 커피를 드셔보시길.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빠지게 된다. 제2보스포루스 대교 인근 유럽 해안에 있는 루멜리 히사르에서 제1보스포루스 대교까지 약 7㎞ 해안 산책로를 걷는 코스도 추천할 만하다. 산책로 곳곳에 있는 벤치에 앉으면 보스포루스 바다와 아시아가 시야에 펼쳐진다.

● 톱카프·돌마바흐체궁 이스탄불에서 술탄 메메트 2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톱카프궁이다. 톱(대포)+카프(문)라는 명명법에서 알 수 있듯이 정복 군주였던 메메트 2세는 궁의 이름도 군사적 맥락에서 지었다. 오스만제국 역대 25명의 술탄들이 400여 년간 이곳에서 집무와 생활을 함께 했다. 박물관으로 개조된 톱카프궁에 가면 이슬람과 기독교의 성물과 술탄의 의상·보석·도자기 등 절대 왕정 시대가 낳은 희귀 보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파리의 베르사유궁을 본떠 19세기에 지은 돌마바흐체궁도 화려한 제국의 영화를 엿볼 수 있는 명소다. 웅장한 샹들리에와 초대형 카펫이 깔린 이 궁전에는 벽마다 명화(모두 560점)가 걸려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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