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식량위기 오나](1) ‘나비효과’와 빈국
ㆍ가난한 수입의존국들, 정치 불안 이어져
세계 최대 옥수수 생산국 미국은 50여년 만의 가뭄으로 흉작이 예상되는 데도 느긋하지만 그 영향을 직접 받는 빈국들엔 비상이 걸렸다.
전 세계 옥수수의 40%를 생산하는 미국은 1995년 이래 최악의 소출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옥수수 재배지는 이번 가뭄으로 경작지 약 90%가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농가 수익에는 큰 변화가 없다. 미 정부의 지원하에 부담비용 중 40%만 내면 되는 곡물보험에 대부분 가입해 손실을 보전받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 정부와 보험회사가 약 200억달러를 농가에 지원할 것으로 최근 예상했다. 생산 곡물은 오른 값에 판매해 농가의 손해를 상쇄한다. 옥수수 가격은 지난 6월 이래 40% 이상 폭등해 21일(현지시간) 시카고상업거래소에서 12월 인도분이 부셸(27.2㎏)당 8.38달러를 나타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곡창지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도 가뭄 탓에 밀 소출이 22% 감소해 곡물 수급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같은 옥수수와 밀 소출 감소는 이를 주식으로 삼는 저개발국가와 빈곤층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 곡물가 상승은 빈국에 식량구호를 해온 국제단체들의 지원 규모를 줄이는 부작용도 낳는다.
전체 밀소비량의 90%를 수입에 의존하는 중동의 빈국 예멘은 전체 인구 절반이 하루 2달러(약 2200원) 미만 소득에 의존하고 있다. 식량가격 폭등은 예멘 국민들의 생계에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20년 전까지 식량자급이 이뤄진 남미의 과테말라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관세철폐와 농업투자 감소로 현재 밀 소비량 전체와 옥수수·쌀·콩 상당량을 미국에서 수입한다. 가계지출 중 식료품 비중이 66%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식량가격이 폭등한다면 대부분 국민은 최소한의 필수영양섭취조차 하기 어려워진다.
미국산 옥수수 의존도가 높은 멕시코도 옥수수로 만든 주식인 토르티야 가격이 2007년 대비 올해 6월 현재 52% 치솟았다. 게다가 올해 가뭄으로 경작지 40%가 타격을 입고 자체 공급량도 줄어 곡물가 충격에 더 많이 노출돼 있다.
멕시코에서는 2년 사이 25% 오른 토르티야 가격에 항의해 2007년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전 세계 약 10억 인구는 이미 먹고살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하다”면서 “이번 식량가격 급등으로 수백만명이 추가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20일 우려했다. 옥스팜은 특히 “지난 30년 가까이 당연시돼온 저가식량시대는 막을 내렸다”면서 “국제 옥수수 재고량이 6년래 최저치를 보이고 있는 점도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곡물 파동에 따른 식량난은 각국 정치에도 영향에 미칠 수 있다.
2011년 아랍 민주화 시위가 식량가격 상승에 따른 불만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있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입력 : 2012-08-22 22:13:10ㅣ수정 : 2012-08-23 10:01:48
‘식품사슬’의 정점에 오른 옥수수, 세계 곡물 파동 촉발
ㆍ체내 탄소 생성의 69% 차지… 친환경 소재에 활용도 증가
미국발 세계 곡물 파동의 근원은 옥수수다. 그 옥수수는 슈퍼마켓 진열 상품의 75%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루에 세 끼 꼬박 챙겨 먹는 일상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의 연속이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이자 환경운동가인 마이클 폴란은 인간은 단지 ‘지 메이스(Zea Mays)’를 먹고 산다고 단언한다. 이는 옥수수의 학명이다. 그는 저서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통해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떤 것이든 결국은 옥수수를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옥수수는 벼, 밀과 함께 세계 3대 식량 작물로 꼽힌다. 재배해 먹기 시작한 것은 500년 정도로, 다른 곡물보다는 짧다. 한국 농촌진흥청 보고서를 보면 옥수수는 전 세계 1억5900만㏊에서 연간 8억1900만t씩(2009년 기준) 생산된다. 밀(6억8600만t)과 쌀(6억8500만t)보다 20%나 많다.

옥수수는 단기간에 ‘식품사슬’ 정점에 올랐다. 이 같은 파급력은 광범위한 활용이 가능한 덕이다. 특히 대부분의 먹거리에 직간접적으로 들어간다. 미국 포브스는 최근 슈퍼마켓에 진열된 식품의 75%가 옥수수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폴란 교수도 가공식품 1500여개 중 1300개 정도에 옥수수가 들어가 이를 빼고 먹기가 힘들다고 설명했다. CNN방송의 의학 전문기자인 산제이 굽타 박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통해 실제 옥수수가 몸에 얼마나 들어갔는지 실험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체내 탄소의 69%가 옥수수에서 생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농진청 보고서는 ‘버릴 것이 없다’고 옥수수를 설명했다. 인간과 가축의 식량뿐 아니라 바이오에탄올로 만들어 연료로도 쓰인다. 알갱이는 속(배유)과 눈(배아), 껍질이 각각 쓰이는 용도별로 분리돼 생활 소비재 속으로 들어가고, 옥수수 속대 역시 식품과 화장품의 재료가 된다.
고과당시럽은 형태가 보이지는 않지만 옥수수가 식품 안에 들어가는 대표 사례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럽은 요구르트와 드레싱, 버터 등의 첨가물로 쓰인다. 이 시럽에 캐러멜 착색제가 합쳐지면 콜라가 완성된다. 옥수수를 먹고 자란 소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소에서 짠 우유는 옥수수 덕에 비타민D가 두 배 많은 강화우유가 된다.
일반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의 옥수수 용도는 더 다양하다. 아스피린에도 옥수수가 들어간다. 반질반질한 약의 바깥면에 발라진 코팅제가 옥수수에서 추출한 셀룰로오스(CAP)인 경우가 많다. 모든 약에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알약이나 가루약을 담는 캡슐에도 쓰인다. 삼키기 좋게 도포를 해주고 위산에 약이 바로 닿는 것을 막아 약효를 오래 지속하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치약에도 옥수수 성분이 있다. 치약 특유의 질감과 맛은 ‘소르비톨’이라는 성분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물질은 옥수수의 포도당으로 만들어진다. 소르비톨이 들어가지 않으면 치약은 미끈거리는 비누 맛이 난다고 한다.
편지봉투나 우표에도 옥수수가 있다. 뒷면에 침이나 물을 묻히는 부분에 숨어 있다. 옥수수에서 뽑아내는 전분은 물(침)이 닿으면 끈적끈적하게 변한다. 이를 얇게 펴 발라진 부분이 끈적끈적했다 다시 마르면서 양쪽 면을 붙드는 데 활용한 것이다.
타이어를 만들 때도 옥수수를 쓴다. 완성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성분이다. 성형 틀에 찍어내는 제품들은 압축 공정을 거친다. 이때 금속으로 만든 틀에 내용물이 붙지 않게 하려면 전분 가루를 뿌려줘야 한다.
옥수수 향이 나는 화장품은 없지만 향수의 주요 성분은 옥수수다. 향수는 기화점이 다른 여러 가지 식물성 알코올을 합성해 향을 만든다. 이때 쓰는 알코올을 옥수수에서 뽑아내는 것이다. 브러시나 아이섀도 등 색조 화장품에도 옥수수가 쓰인다. 샴푸, 컨디셔너에 들어가 모발 화장품이 된다.
친환경 소재로 만든 기저귀에도 옥수수가 들어간다. 아이들이 오줌을 많이 싸도 기저귀가 흠뻑 젖지 않는 것은 층층이 초흡수제가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여러 물질이 혼합된 흡수제에는 에틸렌도 들어간다. 바로 이 물질이 옥수수 녹말(콘스타치)에서 나온다.
친환경 소재를 위한 옥수수 활용은 최근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캔 등의 뚜껑 부분을 보호하고 새 제품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플라스틱 보호막도 옥수수로 만든다. 옥수수에서 추출한 포도당으로 플라스틱과 같은 질감을 낼 수 있게 되면서 가능해졌다. 삼성전자 등이 옥수수 휴대전화를 만들 때도 같은 방식을 활용했다.
<김보미 기자 bomi83@kyunghyang.com>
입력 : 2012-08-22 22:23:28ㅣ수정 : 2012-08-22 23:45:18
한국, 수입 옥수수 75%를 사료로… 가격 뛰면 소·닭·돼지 가격도 올라
22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자료를 보면 한국은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의 옥수수 수입국이다. 2010년 기준으로 국내 총 곡물 수입량 1571만2000t의 57.7%인 905만9000t을 수입했다. 한국의 옥수수 곡물자급률이 0.8%로 미미하기 때문이다. 국내 생산량은 2011년 기준으로 연간 7만4000t으로 아시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국내 사용물량의 대부분을 수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옥수수 수출 판매가격은 농가와 곡물상, 중간거래상, 수요자들이 모여 작황과 수요량 등을 반영해 만들어지는 시카고선물거래소 시세와 농가에서 수출항구까지 물량을 이동하는 데 드는 운반비(베이시스)를 종합해 결정된다. 여기에 걸프만을 거쳐 해당 국가로 운송되는 데 들어가는 선박비용도 국제유가 상황을 고려해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전분당협회 관계자는 “가공식품용 옥수수의 경우 업계 전체로 볼 때 한 달 평균 17만t 정도는 꾸준히 수입해야 공장을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다”며 “가격이 급등한 지금 구입하면 국내로 들어오는 데 걸리는 기간인 3~5개월 후부터는 국내 식료품업체들이 가격 상승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 수입되는 옥수수 양의 75% 이상은 가축 사료로 사용된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백성범 농업연구관은 “옥수수가 국내에서는 사료로 대부분 사용되기 때문에 옥수수 가격이 폭등하면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가격도 덩달아 오른다”고 말했다. 또 옥수수는 어린이들이 즐겨 찾는 스낵, 청량음료, 주스 등을 만드는 데도 사용돼 이들 제품의 가격을 인상시키는 작용을 한다. 한국사료협회는 지난 6월 중순 이후 급등한 옥수수 가격 때문에 당분간 미국과 옥수수 수입 계약을 맺지 않기로 했다.
가뭄에 따른 가격 폭등을 예상하고 6월 초순 국내 민간 사료배합 회사들과 함께 옥수수를 대량으로 구입해 당장 물량 부족 현상이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제는 옥수수 가격이 계속해서 뛰거나 지금과 같은 급등세가 고착화하는 경우다.
사료협회 관계자는 “옥수수 가격이 내려가지 않고 계속 오를 경우 어쩔 수 없이 미국에서 수입해야 한다”며 “이럴 경우 길게는 6개월의 시차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이르면 연말, 늦어도 내년 초가 되면 또 한 차례 국내 사료배합 회사들과 농협 사료공장, 축산농가 등이 가격 상승 압박에 노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사료용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옥수수는 ‘가공식품용’ 옥수수다. 농협경제연구소와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2010년 한 해 가공식품용으로 소비된 옥수수 양은 전체 수입량 905만9000t의 21.4%에 해당하는 193만6000t이다.
가공식품용 옥수수 가격도 비슷한 운송·제조·유통과정을 거친다. 먼저 대상 등 국내 식료품업체들이 시카고선물거래소의 거래가격 수준에 맞춰 옥수수 수입 계약을 맺으면 미국 수출업체가 선적물량을 준비한다. 이때부터 선박을 이용해 국내로 들여오기까지에는 보통 6~8주가 걸린다. 선박이 운송하는 시간은 50일 정도이며 하역항에서 1주일 정도 하역·통관 작업을 거친다. 업체들이 제품 수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1개월치가량의 재고물량과 제조공정을 감안하면 실제 판매가격에 영향을 주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3~5개월쯤 된다.
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가공식품용 옥수수는 사료용 옥수수보다 재고량을 적게 유지하기 때문에 국제 곡물가격 변동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jaynews@kyunghyang.com>
입력 : 2012-08-22 22:23:24ㅣ수정 : 2012-08-22 23:45:25
식량위기의 ‘나비효과’… 러시아·우크라이나 곡물 파동 때마다 제3세계 반정부 폭동 불러
ㆍ중동·북아프리카 등 휘청… 정치·사회적 혼란 줄이어
“아이쉬(빵)! 호레아(자유)!”
지난해 초 이집트 국민들은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하며 타흐리르 광장 등 거리로 나섰다.
이집트의 주식인 ‘아이쉬’ 가격이 치솟자 무바라크 30년 장기 독재에 대한 불만이 더해지면서 민주화 시위로 번진 것이다.
아이쉬 가격 급등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집트에서 직선거리로 3000㎞ 떨어진 러시아에서 2010년 7월 가뭄이 발생, 밀 생산량이 급락하면서 발생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도 식료품 등 생필품 가격 폭등이 독재정권에 대한 불만과 겹쳐 반정부 시위를 순식간에 확산시켰다.
이후 반정부 시위는 알제리, 리비아, 예멘, 바레인, 이란 등으로 번져나갔다. 러시아의 가뭄이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로 이어지는 ‘나비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재스민 혁명은 ‘밀 가격 상승’이 도화선이 됐다.
2007~2008년 곡물파동은 미국, 인도, 중국 등에서 시작됐다. 파동의 진폭은 국제 투기자본이 원자재 사재기에 나서면서 커졌다.
게다가 신흥국의 육류 소비가 늘면서 사료용 곡물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르헨티나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곡물수출국은 자국의 수요 공급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밀, 옥수수, 대두에 수출세를 부과하거나 수출중단을 선언했다. 곡물 가격이 유례없이 치솟았다.
선진국과 신흥개도국, 곡물수출국들의 ‘날갯짓’에 정작 휘청댄 것은 3세계 국가의 빈민층이었다.
2008년 2월 아프리카 카메룬에서는 식품 가격과 오일 가격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이는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4월 방글라데시에서는 1만5000명의 노동자들이 높은 식품 가격과 낮은 임금에 항의하며 공장시설을 파괴하고 버스와 승용차를 부수는 등의 폭동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코트디부아르, 이집트, 아이티, 모잠비크 등 30여개국에서 시위와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올해 미국발 곡물 가격 급등 상황이 심각해지면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 국가에서 또다시 시위와 폭동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 시위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당장 눈여겨봐야 할 곳은 알제리, 수단, 바레인 등이다. 바레인은 수니파와 시아파 간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돼 정치사회적으로 혼란기를 겪고 있다. 알제리와 수단은 실업률이 30%를 넘어섰다.
수단의 경우 최근 남수단이 분리되면서 무력충돌 등 정치적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는 “알제리와 수단은 2010년 곡물파동 때 크고 작은 시위를 경험한 나라들로 정치, 사회, 경제적 환경도 예전 튀니지나 이집트와 유사해 물가 폭등으로 경제가 어려워지면 또다시 폭동, 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입력 : 2012-08-22 22:02:12ㅣ수정 : 2012-08-22 23:44:38
[세계 식량위기 오나]상시화하는 곡물파동… 무너진 거래질서
곡물가격은 더 이상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의 작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2000년대 들어 금융시장의 불안정이 심해지면서 원자재 등 상품투자로까지 영역을 넓힌 글로벌 투기자본은 곡물시장에서도 가격을 좌우하는 막강한 권력이 된 지 오래다. 올 들어 미국 중서부와 흑해 연안, 호주 등 주요 곡창지대에 가뭄이 지속되면서 옥수수와 콩, 밀 등 3대 주요 작물의 가격이 모두 폭등했다. 6월1일을 기점으로 지난 17일까지 옥수수는 45%, 밀(소맥) 43%, 콩(대두)은 24%씩 각각 가격이 급등했다. 이상 기후에 따른 작황 부진으로 공급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이 최근 곡물가 상승의 첫번째 이유다.


▲ 금융위기 후 투기자본 유입
가격질서 왜곡 장기화될 듯
그러나 같은 기간 3대 작물의 선물거래에 쏟아진 투기자본 규모를 보면 곡물가격이 단순히 수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곡물 선물거래량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시카고 상품거래소(CBOT)의 3대 곡물 매매 약정현황 자료를 보면 지난 6월 초 9만3000여건을 기록했던 옥수수의 비상업용(투기적) 순매수 계약은 8월 중순 31만6000여건으로 세 배 이상 급증했다. 비상업용 순매수 포지션이 늘었다는 것은 실제 곡물수요가 아니라 시세차익을 노리고 곡물에 베팅하는 ‘핫머니’가 그만큼 많이 유입됐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 밀 선물 비상업용 순매수 계약 역시 마이너스 1만3000여건에서 5만5000여건으로 크게 늘며 2008년 애그플레이션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결국 선물시장에서 주요 곡물에 대한 투기적 순매수가 급증하면서 가격 상승폭이 더 확대된 것이다.

채현기 대신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3일 “수급불안이 초기에 해소된다 해도 한번 투기세력이 붙고 계속해서 곡물가가 오를 것 같다는 기대심리가 시장에 퍼지고 나면 연쇄적으로 급등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면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투기자본의 규모가 커지며 기후에 의한 생산량 변동보다 헤지펀드 등 투기세력의 ‘방아쇠’ 역할이 곡물가 상승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06년 이후 약 2년을 주기로 반복된 곡물 파동을 살펴보면 쌀과 옥수수 등 곡물 생산량이 증가하는 동안에도 가격이 앙등하는 현상이 발견된다. 수요공급의 원칙을 압도하는 곡물시장의 가격 왜곡 구조가 점점 고착화돼가고 있는 것이다.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일반화된 전 세계적 저금리 기조도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투기자본을 곡물시장으로 유인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들어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우려가 일부 완화된 것도 위험자산 선호심리를 자극해 곡물시장으로 글로벌 유동성이 몰려드는 계기를 마련했다.이광우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일반적으로 달러화 약세 현상은 곡물을 포함한 상품시장의 강세로 연결된다”면서 “미 연준이 3차 양적완화를 실시하는 등 시장 유동성이 확대될 경우 투기적 가수요가 늘어나며 곡물시장의 불확실성과 가격 변동성이 더 커지고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입력 : 2012-08-26 21:39:42ㅣ수정 : 2012-08-26 22:21:22
[세계 식량위기 오나](2) 국제 곡물파동 주기1~3년으로 빨라졌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입력 : 2012-08-26 22:03:43ㅣ수정 : 2012-08-27 00:48:08
[세계 식량위기 오나]카길 등 초대형 상사, 저장·운송시설도 장악
1980년 이상 저온으로 벼농사가 타격을 입었다. 쌀 생산량이 355만t으로 전년도의 70% 수준으로 급감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쌀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정권의 정통성도 없는 상태에서 식량난까지 발생하면 정권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은 즉시 ‘곡물 메이저(Grain Major)’와 접촉했지만 협상은 애초부터 불평등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팔아도 그만 안 팔아도 그만이지만 다른 한쪽은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결국 한국은 국제 시세의 2배가 넘는 t당 500달러에 쌀을 구입해야 했다. 국내 한 대기업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3만여t의 옥수수를 생산했다. 그러나 이를 국내에 들여오지 못하고 헐값에 현지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장·운송 시설을 독점하고 있는 곡물 메이저의 횡포 때문이었다. 세계 곡물 가격은 초대형 곡물 상사인 곡물 메이저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카길(Cagill), ADM, 벙기(Bunge), 루이드레퓌스(LDC) 등 상위 4개 회사가 전 세계 곡물 교역량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곡물 저장시설과 곡물 운송을 위한 항만시설 등도 각각 75%와 50%를 점유하고 있다. 한국도 이들 곡물 메이저들로부터 전체 수입 물량의 60%가량을 들여오고 있다. 2008년 기준으로 콩 65.8%, 옥수수 62.4%, 밀 58.4%에 이른다. 한국은 세계 5위의 곡물 수입국이지만 이들 회사에 철처히 예속돼 있다. 곡물 메이저의 영향력은 흉년에 더욱 막강하다. 곡식 한 톨이 아쉬운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거래라는 게 있을 수 없다. 작황이 좋지 않아 옥수수 가격이 급등했던 2006~2008년 4대 곡물 메이저의 판매 가격은 t당 평균 274달러로 다른 곡물회사보다 20달러가량 비쌌다. 밀은 연중 내내 다른 곳보다 t당 50달러 정도 높다. 곡물 메이저들은 농산물 교역과 관련한 국제협상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계 자본인 카길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이다. 미국 정부는 ‘카길의 세일즈맨’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1990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미국을 대표해 협상을 주도한 인물이 당시 카길의 부회장이었다. 2003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서도 카길이 제안한 내용이 미국의 협상안에 그대로 반영됐다. 2011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는 ‘급격한 식량 가격 폭등을 규제하자’는 프랑스의 의견을 미국이 반대했다. 배후에 카킬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곡물 메이저의 힘은 정보력에서 나온다. 각국 정부보다도 더 신속하게 농업 작황을 파악한다. 일례로 카길은 자체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은 물론 러시아 등 전세계 주요 곡창지대를 매일 수차례씩 점검한다. 흉작이 들 것이라고 판단되면 전 세계의 곡물을 매점 매석하는 것이다. 세계 곡물 작황을 놓고 ‘머니게임’을 벌이는 시카고 선물시장에도 개입한다.
카길은 1865년 스코틀랜드 출신 사업가인 윌리엄 카길이 미국 오하이오주의 곡물 저장고를 사들이면서 출범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곡물가격이 급등하면서 사세가 크게 성장했고, 1998년에는 라이벌인 콘티넨털 그레인(Continental Grain)을 인수·합병했다. 2003년에는 100억달러 규모의 헤지펀드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카길의 지배구조는 봉건적이다. 창립자인 카길 가문과 맥밀런 가문이 회사 지분의 85%를 보유해 미국에서 개인소유 비중이 가장 높다. 증권시장에 상장되지 않아 회사의 재무제표도 공개되지 않는다. 워낙 독점적인 이윤이 크기 때문에 기업공개보다는 세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50여개국에 5만5000명을 고용하고 있고 2008년에는 40억달러의 순수익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ADM은 미국 일리노이주를 기반으로 브라질 등 남미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벙기는 1818년 네덜란드에서 출발해 남미의 아르헨티나를 기반으로 성정했다. 프랑스계인 루이드레퓌스는 곡물 유통 외에도 닭고기 등 가금류 가공 및 유통사업에 강점을 갖고 있다.<오창민 기자 riski@kyunghyang.com>
입력 : 2012-08-26 21:39:33ㅣ수정 : 2012-08-26 21:39:33
[세계 식량위기 오나]엘니뇨·가뭄·추위… 2010년 이후 국제곡물가 2배 수준
2010년 9월 이후 국제 곡물가격은 2002~2004년 평균 곡물가격의 2배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가격이 급등할 수 있는 취약한 정치경제 구조를 가진 국제 곡물시장에 이상기후라는 외부충격이 2010년 이후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러시아 가뭄으로 밀가격이 폭등하더니 8월에는 파키스탄의 대홍수로 쌀가격이 급등했다. 그해 11월에는 라니냐의 영향으로 가뭄과 고온이 지속돼 아르헨티나의 옥수수와 대두 작황이 좋지 않았다. 미국은 건조한 기후의 영향으로 붉은 밀의 생산이 감소했다. 그 즈음 시작된 중국 밀 생산지의 가뭄은 다음해까지 지속됐다. 2011년 봄, 멕시코의 이상추위로 옥수수 생산 감소가 예상되면서 옥수수 가격도 급등했다. 올해 초에는 남미 가뭄으로 대두 생산량이 감소해 콩 가격이 상승했다. 중국에서는 여름 가뭄의 영향으로 옥수수 작황이 부진했다. 지난 6월부터는 미국 중서부에 최악의 가뭄이 닥쳐 옥수수·대두 수확량이 감소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곡물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헝가리, 루마니아, 이탈리아 등에서도 폭염과 가뭄이 발생해 밀 수확량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됐다. 최근 엘니뇨가 시작되면서 호주와 인도에도 가뭄 징후를 보이고 있다. 엘니뇨는 중남미에는 폭우와 홍수를, 호주와 인도에는 가뭄을 일으킨다. 전문가들은 곡물가격 강세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독과점 구조 심화
주요 수출국, 공급 줄이면 식량파동 불 보듯
2000년 이후 세계 곡물시장에서는 수요가 가파르게 증가했지만 공급이 따라오지 못하면서 수급불균형 문제가 발생했다. 곡물 소비량은 1980년 이후 연간 14억t 수준에서 현재 22억8700만t으로 급증했다. 신흥국에서의 소비가 급증하고, 미국 등 선진국의 바이오연료 의무사용 증대 등으로 곡물 수요가 지속적으로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협정(FTA) 등 농산물 시장 개방압력이 거세지면서 곡물 수출국에 대한 수입국의 의존성이 심화됐다. 옥수수는 미국·브라질·우크라이나·아르헨티나 4개국이, 대두는 브라질과 미국 2개국이 전 세계 무역량의 80%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주요 수출국이 곡물 공급을 급격히 줄이면 세계적인 식량 파동으로 직결됐다. 최근 국제 곡물가격 급등현상의 주 원인은 옥수수 주요 수출국인 미국의 가뭄이다. 밀 수출 3위 국가인 러시아도 기상악화 영향을 받고 있어 세계 밀 생산량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미 농무부(USDA)는 2012~2013 곡물연도 전 세계 곡물 생산량을 전년 대비 2.7% 감소한 22억4700만t으로 전망했다. 곡물 소비량 전망치는 이보다 4000만t 많다.
■ 식량보호무역주의
자국 경제 보호 이유 마음먹으면 ‘수출 제한’
사료업계는 최근 사료용 밀(소맥) 가격이 올라가자 밀 수출국인 러시아를 주시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는 밀 작황이 좋지 않다. 2007~2008년 곡물파동 때 러시아는 밀에 40%, 보리에 30%의 수출세를 부과해 규제한 전력이 있다. 2010년 러시아의 밀 생산지에 심각한 가뭄이 들자 밀, 보리, 호밀, 옥수수 등 곡물 수출을 중단하기도 했다. 곡물 수출국이 수출을 규제하자 국제 곡물가격은 또다시 급등했다. 아르헨티나(2008년), 우크라이나(2008, 2010년), 중국(2008년), 인도(2008년) 등 다수의 곡물 수출국도 애그플레이션이 발생할 때마다 자국 곡물 수출을 제한했다. 미국은 국내 곡물 공급 부족 시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수출제한을 할 수 있는 수출관리법을 우루과이라운드 이전에 이미 마련해 놓았다. 호세 그라시아노 다 실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사무총장은 지난 13일 “곡물가격 안정을 위해서는 각국이 이기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윤병선 건국대 교수는 “평소 농산물 무역 자유화를 주창했던 곡물 수출국들이 식량위기 상황이 오자 수출을 제한하는 모순이 연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에너지원으로 사용
옥수수, 식량보다 바이오연료로 3배 더 소비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40%인 1억2000만t가량이 바이오연료로 사용된다. 미국 내에서 식량으로 소비되는 옥수수는 11%, 가축용 사료는 36%다. 나머지 13%는 수출된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는 미국이 현재의 2배로 바이오연료 시설을 확대하면 2020년에 옥수수 가격은 72% 상승하고, 현재 시설을 유지하더라도 26%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이 옥수수를 이용한 바이오연료에 눈을 돌린 것은 2005년 부시 행정부 때였다. 고유가 상황에서 이라크 공격을 통해 석유를 확보하려는 계획이 어긋나자 바이오연료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농업계의 표를 얻기 위한 속셈도 있었다. 거대 농식품 복합기업인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는 미국 바이오 에탄올의 28%를 생산한다. 엑손모빌, 셰브론, BP 등도 바이오연료 산업에 뛰어들었다. 최근 밀가격이 폭등하자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미국에 바이오연료 정책을 일시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국내 사료업계의 한 임원은 “미국 입장에서는 옥수수를 타국에 비싸게 팔려고 할 텐데 바이오 에탄올로 가는 옥수수의 비중을 크게 낮추겠냐”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입력 : 2012-08-26 21:27:59ㅣ수정 : 2012-08-26 23:55:06
세계 식량위기 오나](3) 누가 한국 농업을 버렸나
미국 중서부와 흑해 연안의 가뭄 여파로 연말쯤 국내 사료 가격이 사상 최고가로 치솟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축산농가는 국제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서 사료 가격이 폭등했던 2008년 상황이 재현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축산농가에서 사용하는 배합사료 가격은 2011년 초 이후 꾸준히 상승하는 추세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2008년 닭·돼지·소 사료의 가중평균가격은 25㎏ 기준 1만3700원으로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2011년 2월 1만1475원으로 바닥을 찍은 뒤 올해 7월 현재 1만3375원으로 최고가에 근접했다. 사료업계 관계자들은 연말쯤 사료 가격이 지금보다 10% 안팎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연말 배합사료 가격이 8.8%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고, 사료업계의 전망치는 이보다 높다. 한국사료협회 관계자는 “지난해와 올해 사료업체들의 생산량, 원료 가격 상승분을 감안했을 때 연말쯤 배합사료 가격이 10% 정도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사료 가격이 8.8~10% 뛸 경우 가중평균가격은 25㎏ 기준 1만4552~1만4713원으로 2008년의 사상 최고가를 갈아치우게 된다. 축산농가들은 직격탄을 맞게 됐다. 충남 아산에서 돼지 2500마리를 키우는 장명진씨(49)는 “돼지 농장이 대부분 자동 사료 라인에 따라 곡물만 주도록 돼 있고 요즘 돼지는 곡물만 먹고 살을 찌우도록 개량돼 재래식 농법으로 하면 살이 안 오른다”며 “지금도 적자 상황인데 사료값이 더 오르면 15억원 빚을 갚기는커녕 도산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북 군산에서 한우 150마리를 키우는 장성수씨(56)는 “소 등급이 잘 나오게 하려면 곡물사료를 많이 먹여야 하는데 비싼 곡물사료를 써도 소 출하 가격은 떨어지는 추세니 농가는 결국 마이너스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인건비라도 건지려고 사료 회사에서 보릿겨, 쌀겨, 옥수수를 받아다가 직접 자가 사료를 만드는데 연말에 곡물 가격이 올라가면 이마저도 소용없게 된다”고 말했다. 성명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실장은 “중장기적으로 사료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며 “현재 농지 부족과 예산문제, 농가 고령화 등으로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국내 기반이 열악하다”고 말했다. 성 실장은 “곡물이 많이 소요되는 육식 문화를 바꾸는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입력 : 2012-08-29 22:28:03ㅣ수정 : 2012-08-29 23:45:44
[세계 식량위기 오나]“2년 키운 한우 원가 640만원, 팔 땐 700만원… 내 연봉 450만원”
지난 25일 강원 춘천시 강촌리의 ㄱ한우목장 앞. 사료 100여포대를 실은 1t트럭에서 목장주 전기환씨(51)가 내렸다. 누런 소들이 울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이 일주일 동안 먹을 밥입니다.” 트럭에 실린 사료를 목장 안으로 옮기며 전씨가 말했다. 사료포대에는 ‘20㎏ 축협바이오사료’라고 쓰여 있다. 옥수수, 청보리 등 곡물에 박류, 볏짚, 건초 등을 섞어 발효시킨 완전혼합발효(TMF) 사료다. 사료에 쓰이는 곡물은 대부분 외국산이다. 전씨는 목장 한쪽에 쌓여 있는 사료포대를 뜯었다. 사료가 수북이 쌓이자 소들이 큰 눈을 뜨고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아직 사료를 받지 못한 소는 계속 울부짖었다. “빨리 밥을 달라는 거죠.”

전기환씨가 지난 25일 강원 춘천시 강촌리 자신의 농장에서 소에게 사료를 주고 있다. 한우 100여마리를 키우는 전씨는 연간 순이익이 450만원 수준이라고 밝혔다. |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전씨가 우는 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식사를 끝낸 소들은 긴 혀로 바닥을 계속 훑고 있었다. 전씨는 하루에 두 차례 100여마리의 소에게 사료를 먹인다. 이 목장 한우의 식사시간은 아침 7시와 저녁 6시. 하루 두 차례씩 한우 100여마리가 한 달간 먹는 사료의 양은 20㎏ 사료 1240포대로 25t에 이른다. 값으로 치면 720만원을 웃돈다. 올해 말이 되면 사료값이 큰 폭으로 오른다. 미국 중서부 지역의 가뭄으로 사료에 많이 쓰이는 옥수수의 작황이 나빴기 때문이다. 옥수수와 소맥(밀) 등 곡물로만 이뤄진 배합사료의 가격이 8% 이상 오를 것으로 보인다. 볏짚·건초 등 조사료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완전혼합발효 사료 가격도 주재료인 옥수수, 박류의 가격이 급등하면 오를 수밖에 없다. 전씨는 “한우 출하가격은 점점 떨어지는데 사료 가격이 더 오르면 농가는 죽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우농가는 6개월짜리 송아지를 사서 24개월 동안 기른 뒤 시장에 내보낸다. 2년 전 전씨가 우시장에서 송아지를 샀을 때의 가격은 한 마리에 250만~270만원이었다. 2년간 송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 데 들어간 사료비는 290여만원. 송아지 가격과 사료비용을 더하면 560만원이다. 여기에 2년간 목장에 깐 톱밥과 볏짚, 관리비 등 80여만원이 추가된다. 30개월짜리 한우 원가가 630만~640만원에 이르는 셈이다. 원가의 대부분은 사료값이다. 전씨는 이렇게 키운 소를 팔아 700만원을 받았다. 2년 동안 키운 한우 한 마리에서 나오는 이익은 60만원이었다. 전씨는 “올해 출하했거나 출하할 예정인 소가 모두 15마리니까 지난 2년 동안 한우 비육으로 인한 순이익은 900만원 정도”라며 “연봉 450만원인 셈이니 나처럼 한우 오래 키워온 사람 말고는 누가 선뜻 이 일을 하려 하겠냐”고 말했다.전씨는 200만원이 넘는 송아지 구입가격을 아끼기 위해 몇 해 전부터는 암소를 직접 길러 송아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수정하는 데 드는 5만여원을 아끼기 위해 직접 수정기술도 배웠고, 사료 배달비용을 절감하겠다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춘천 시내로 나가 100여포대에 달하는 사료를 직접 싣고 온다. 그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니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년간 목장을 운영해온 전씨는 농협에 2억50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다. 올해 갚아야 할 원금도 3000만원에 이른다. 전씨는 “여기서 사료값이 더 오르면 빚을 갚을 수가 없다”며 “정부가 대출 이자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결국 농가 빚만 늘릴 뿐”이라고 말했다.
<춘천 |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입력 : 2012-08-29 22:21:44ㅣ수정 : 2012-08-30 00:51:51
[세계 식량위기 오나]밀 75%, 콩 99%, 옥수수 94%가 미국 등 3개국에 편중
■ 작물 생산량 하락… 육류소비 급증
쌀, 보리, 콩, 감자, 잡곡 등 국내 식량작물 생산량은 감소 추세다. 1970년대 연간 700만t 안팎이었던 국내 식량작물 생산량은 2010년 480만t으로 줄었다. 밀과 보리, 콩의 감소폭이 컸다. 1970년 83만㏊였던 밀·보리 재배면적은 2010년 5만1000㏊로 줄었고, 같은 기간 생산량도 182만t에서 8만1000t으로 낮아졌다. 1인당 곡물소비량도 크게 줄었다. 1970년엔 한 사람이 1년에 219㎏의 곡물을 소비했지만 2010년에는 125㎏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반면 육류 소비량은 1970년 16만5000t에서 2010년 191만t으로 12배가량 늘었다. 공급량도 함께 늘어 같은 기간 국내 돼지 사육 마릿수는 9배로 불었다. 한·육우는 2.2배, 젖소 18배, 닭은 6.3배로 사육 마릿수가 증가했다. 소고기 1㎏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곡물의 양은 10㎏에 달한다. 같은 양의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각각 5㎏과 2㎏의 곡물이 필요하다. 육류 소비를 위한 사료곡물은 수입해 충당할 수밖에 없다. 사료용을 포함해 국내에서 소비되는 곡물 중 72.4%가 해외에서 들어오고 있다. 밀, 콩, 옥수수 등 3대 작물에 대한 해외 의존도는 심각하다. 밀과 옥수수는 99.1%, 콩은 89.9%를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다.

■ 곡물 수입, 특정국·곡물메이저 편중
국내 소비 곡물의 대부분은 특정 국가로부터 수입한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00~2009년 국내 곡물 수입량 기준으로 밀 수입국은 미국(36.9%), 호주(27.7%), 우크라이나(11.2%)에 집중돼 있다. 콩은 미국(65.0%), 브라질(26.2%), 중국(8.4%)으로부터 수입량의 99.6%를 충당한다. 옥수수는 미국(44.5%), 중국(41.6%), 브라질(8.6%)에서 수입한다. 이들 국가에서 이상기후 현상 등으로 공급이 급격히 감소하면 국내 곡물시장은 급격한 곡물 가격 변동 충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국내 수입곡물에 대한 4대 곡물 메이저의 비중도 상당하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카길(Cagill), ADM, 벙기(Bunge), 루이드레퓌스(LDC) 등 상위 4개 회사가 2003~2008년 국내 수입된 3대 곡물의 50%가량을 담당했다. 한국의 4대 곡물메이저 의존도는 밀 46.7%, 콩 46.4%, 옥수수 62.4%에 이른다. 대두의 경우 일본계 곡물기업인 마루베니로부터 수입하는 물량이 52%다.

■ 선물보다 현물거래 가격위험 노출
국내 곡물, 제분업체의 곡물 확보는 주로 현물거래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5~10% 정도의 수입곡물이 선물거래를 통해 가격위험을 관리하고 있다. 최근 가격이 오른 수입 옥수수와 밀을 6개월 전에 낮은 가격으로 선물시장에서 거래했더라면 연말 국내 곡물 가격 급등의 폭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의 경우 농민들은 자신이 가진 농작물의 20~30%를 선물시장을 통해 팔아 가격 변동 위험을 분산(헤지)한다. 외국 곡물업체나 제분업계의 선물거래 비율은 이보다 훨씬 높은 편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사료업체의 선물시장을 통한 구매 비율이 10%에 훨씬 못 미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승룡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사료업계가 공동구매로 곡물을 충당하다 보니 불필요한 가격 전쟁을 원치 않는다”며 “선물거래를 통해 구매가격을 낮추는 노력보다는 곡물 가격이나 환율 상승을 사료 가격 인상을 통해 고스란히 축산농가에 전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사료협회 관계자는 “업체들 규모상 공동구매 형태로 곡물을 들여올 수밖에 없다. 선물거래를 늘리라는 주장은 결국 투기를 하라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윤병선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카길 등 곡물 메이저가 온갖 정보를 다 가지고 국제 곡물시장을 주무르는 입장에서 우리는 한정된 정보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분명 있다”면서도 “위험 분산 차원에서 농산물 선물거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입력 : 2012-08-29 22:21:38ㅣ수정 : 2012-08-30 00:52:15
[세계 식량위기 오나]역대 정부, 농지 줄이고 FTA로 농업 포기… 식량자급 역주행

1980년대 말 서울 강남구 수서·일원지구는 논농사를 짓는 농업지역이었지만(왼쪽 사진) 지금은 일원동 목련타운 아파트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농촌 개발 빌미 법 수시 개정
공장·골프장 규제 완화 효과
FTA 등 농산물 개방엔 앞장
정권마다 농지법을 개정, 농지가 아파트나 공장 등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을 부추겼다. 박정희 정부 시절 제정한 농지보전법은 농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법은 수차례 개정되면서 농지 전용 금지가 완화됐다. 전두환 정부는 1986년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며 농어촌 지역에 공장을 유치했다. 1990년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을 제정해 농지의 용도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시장과 군수에게 줬다. 지자체가 권한을 갖게 되자, 농지가 공장이나 주택 등으로 전용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정부는 뒤늦게 농지 전용 시 부담금을 부과하도록 했지만, 농지 위에는 벼나 밭작물 대신 산업시설이나 아파트가 들어섰다. 1994년 김영삼 정부는 아예 시·군이 농지를 관리하도록 농지법을 개정했다. 농지 난개발이 급증했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뒤늦게 지자체의 농지 전용 권한을 축소했지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농지 관련 규제를 다시 완화했다. 농촌진흥청은 “두 정부 모두 농업보호구역인 ‘농업진흥지역’의 생산기반을 정비하는 데 그쳤다”며 “농지면적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비농업진흥지역의 농지보전 대책이나 농업기반 정비에는 소홀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지역 개발촉진에 관한 특별법(삶의 질 특별법)’을 제정, 농촌 개발 및 투자 활성화를 꾀했다. 살기 좋은 농촌을 만들겠다는 의도였지만 도시 투기자본의 농촌 유입만 수월해졌다. 농경지에 골프장을 비롯한 위락시설이 난립했다. 2006년에는 시·도지사에게 일정한 조건만 갖추면 농업보호구역인 ‘농업진흥지역’을 해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2006~2010년 5년간 매년 1만5000㏊ 이상의 농지가 사라졌다.

농업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역대 정권은 농산물 시장을 앞다퉈 개방했다. 한국은 1967년 제네바관세협정(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을 시작으로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아젠다(DDA) 등 다자간 무역자유화에 참여했다. 농수산품에 대한 관세는 차례로 무너졌고, 급기야 한국은 관세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양자간 협정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역대 정부는 농지를 없애고, 농수산물 시장을 내주는 대신 정보기술(IT), 전자, 자동차 산업 등의 육성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됐지만, 식량 주권은 약화했다. 상시화하고 있는 식량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곡물자급 능력마저 상실한 것이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세계 식량위기 오나]농업 자유무역, 식량위기에 취약
ㆍ유엔 ‘경고’… 한국 거꾸로 확대
“(개발도상국의) 농업시장이 기본적인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국제 경쟁에 개방되는 것은 빈곤 퇴치와 식량 안보, 그리고 환경 문제에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WHO)가 구성한 공동 연구기구인 ‘개발을 위한 농업 기술과 과학에 대한 국제 평가’(IAASTD)가 2008년 펴낸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보고서는 “각국의 식량 수입이 증가하면서 어떤 나라도 (식량 위기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고 밝혔다. 농산물 수출국들이 주도하는 ‘농업 자유무역’이 식량위기 해소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의 지적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유럽연합(EU), 미국 등 거대 경제권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농산물 시장을 추가로 개방했다.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과의 FTA 협상도 진행 중이다. 동시다발적 FTA 추진으로 인해 한국 역시 멕시코 등 중미국가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미국가들은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식량주권이 훼손되고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됐다. 미국의 싱크탱크 국제정책센터(CIP)의 아메리카스 프로그램은 지난해 11월 ‘자유시장으로 인한 중미의 식량위기’라는 보고서에서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으로 대표되는 ‘통상 자유화’ 이후 중미 정부들은 자국에 싼값에 대량 수입되는 상품을 굳이 국내에서 생산하지 말도록 권유했다”고 밝혔다. 엘살바도르·코스타리카·과테말라·온두라스·니카라과·도미니카공화국 등 6개국은 2005년 중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농업은 제조업, 서비스업으로 대체됐고, 2001년 평균 40%대에 달했던 중미지역의 농업용지는 2008년 7.4%까지 떨어졌다. 자국에서 식량수급을 제어할 수 없게 된 이들 국가의 물가는 세계 곡물가격 등락에 따라 휘청거렸다. 2008년 식량위기 당시 엘살바도르 도심의 1인당 한 달 기본 식품비는 44.8달러로, 전년(38.4달러)보다 6.4달러 올랐다. 멕시코에서는 2007년 옥수수로 만든 주식인 토르티야 가격이 급등해 폭동이 발생했다. 로라 칼슨 멕시코시티 국제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지난해 10월 미국 ‘포린폴리시 인 포커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이후 수백만명의 멕시코인이 기아 상황에 놓였다”며 “멕시코의 영양실조는 자신들이 소비할 기본적인 식량을 생산하는 것에서 ‘식량안보’ 모델로의 이행을 강제한 북미자유무역협정과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식량 확보를 위한 식량안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식량안보는 국민에게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개념으로, FTA가 상징하는 식량무역의 자유화를 전제로 하고 있어 자급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무시된다. 이 때문에 국민의 먹거리를 국제시장에 의존하게 하고 자국 농업이 파괴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국제 소농운동단체인 비아 캄페시나가 1996년 제기한 ‘식량주권’은 무역 자유화보다는 지역 내 생산을 강조한다. 식량 확보라는 결과만 따지는 게 아니라 지역의 소농들이 토지, 종자 등을 자주적으로 관리하는 것의 중요성과 농업의 생태성까지 고려한다. 윤병선 건국대 교수는 “동시다발적인 FTA 체결, 해외 식량기지 건설, ‘한국형 카길’ 설립 등을 추구하는 한국 정부는 전형적인 식량안보 논리를 좇고 있다”며 “교역을 통한 식량 확보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에서 벗어나 로컬푸드운동과 같은 지역 내 생산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했다.<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입력 : 2012-08-29 22:19:13ㅣ수정 : 2012-08-29 22:19:13입력 : 2012-08-29 22:19:29ㅣ수정 : 2012-08-29 22:19:29
[세계 식량위기 오나](4) 전문가들이 말하는 대안
“밀·콩·보리 등 주요 곡물에 대한 국내 자급률을 끌어올려야 한다.”
농업 경제·정책 전문가들과 농민단체 관계자들은 3일 경향신문과의 대담에서 상시화하고 있는 세계 곡물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내 자급률 향상 및 법제화’ ‘곡물수매제 도입’ ‘농지 확보’ 등을 제시했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국제적 공조강화 움직임에 대해서는 “필요하지만 실효성 있는 공조를 이루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농지 전용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도 다수였다. “국내 축산 시스템을 소규모 지역순환체제로 전환하고, 육식 소비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전문가 9명과의 대담은 전화 인터뷰로 이뤄졌다.

유엔 식량농업기구 직원들이 지난 7월18일 소말리아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있다. 유엔은 소말리아 지역 기근으로 250만명이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돌로(소말리아) | AP연합뉴스
■ “공조 필요하지만 실효성 없어”
지난달 30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1개국 재무장관들은 “최근 농산물 가격 급등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있다”며 “수출 금지나 수출 제한 조치를 막겠다”고 합의했다.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 곡물파동 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곡물 수출국들이 취한 농산물 수출 제한 조치의 재등장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달 23일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에게 국제 곡물가격 안정을 위한 공조노력을 촉구하는 협조 서한을 발송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는 국제공조가 실효성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안에서 수출국이 자국 사정에 따라 수출 금지를 했을 경우에 다른 나라들이 규제할 수 있는 어떤 조치도 없다”며 “구속력 없는 선언에 불과하며 국제정치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농어업부문 공동선대위원장으로 MB정권 농어업정책의 뼈대를 세운 사람이다.
윤병선 건국대 교수는 “국제공조가 힘을 받으려면 곡물 수출 주요국인 미국부터 다량의 옥수수를 바이오 연료로 전환하는 정책의 변화부터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정환 GSnJ인스티튜트 이사장은 “큰 기대를 하긴 어렵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국제공조가 잘되도록 문제제기하고 무엇보다도 WTO(세계무역기구) 안에서 논의의 장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자주율보다 자급률 향상 우선”
정부는 해외 곡물기지 건설 및 조달을 통해 곡물 자주율을 현재 27%에서 2015년 55%, 2020년 65%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2009년 민간기업과 함께 동남아시아에, 지난해에는 곡물유통회사를 설립해 미국에 각각 진출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국내 자급률을 높이는 방안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송원규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연구원은 “국내에서 자급률을 높이는 방안부터 고민한 뒤 해외에서 조달하는 방법으로 가야 하는데 현 정부는 자주율이라는 개념을 도입, 곡물의 해외 조달에만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석원 교수도 “해외농장 및 해외곡물유통회사 설립 등은 결국 제2방안”이라며 “제1방안은 국내 생산자원 활용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국내 기업이 해외 곡물유통시설을 확보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환 이사장은 “1인당 경지면적이 고작 396㎡(120평)인 상황에서 쌀, 채소, 과일, 사료까지 키운다”며 “국제곡물시장에서 원활한 물량 조달을 위해 곡물유통시설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수매제는 WTO 규정에 위배”
수매제는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직접 농산물을 사들여 비축했다가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방출하는 제도이다. 수입농산물과의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농가소득도 올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쌀의 경우 2005년까지 수매제였다가 이후 정부가 시장가격으로 사서 비축하는 공공비축제로 전환했다. 전농·전여농 등 농민단체와 몇몇 전문가들은 밀·보리 등의 곡물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매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 9명의 의견은 엇갈렸다. 윤병삼 충북대 교수는 “곡물을 수매해서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양승룡 고려대 교수는 “WTO가 금지하는 보조금에 해당해 운용하기가 녹록지 않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WTO 체제 내에서 식량안보 관련 보조금을 허용하도록 합의가 돼야 한다”며 “WTO에서 적극적인 합의를 통해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국가수매제를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반면 윤병선 교수는 “생산자 단체인 농협이 수매의 주체가 된다면 WTO 규제를 벗어날 수 있다”며 수매제를 지지했다. 윤석원 교수는 “현재 우리 밀, 우리 보리 등에 대한 소비시장이 형성되지 못했다”며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수매를 해서 적절한 가격으로 제분업체 등 가공업체들에 공급하는 과정이 5~10년 동안 지속돼야 비로소 국내산 곡물에 대한 시장이 형성돼 자급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 “농지 확보가 시급하다”
전문가들은 “농지 전용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명철 농협경제연구소 축산경제연구실장은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기반인 농지를 최소한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할지부터 목표로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실장은 “수치 목표가 없으면 농지 전용이 무분별하게 이뤄져 자급률은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농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생산자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며 “4대강 유역 등 하천 주변에도 보리 등 조사료를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영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팀장은 “이명박 정부 이후 우량농지가 큰 폭으로 감소했다”며 “농지 목표 설정도 중요하겠지만 정부가 농업을 보호하고 식량안보를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양승룡 교수는 “미국은 곡물이 과잉생산돼 가격이 낮아질 경우,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농지를 빌려 농사짓는 대신 습지대로 만든다. 곡물 가격이 높아져 식량문제가 심해지면 그 농지를 다시 이용한다”며 “한국은 그러나 비농업지역으로 규제를 풀어주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윤병삼 교수는 “장기적으로 필요한 농지 규모를 법제화하는 방안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이모작 등 수확을 끝낸 논에 보리 등을 재배해서 100% 조금 넘는 현재의 경지 이용률을 높이는 쪽으로 가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 “곡물 자급률 법제화해야”
곡물 자급률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성명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실장은 “현재 곡물 자급률을 설정해도 실질적인 노력은 미흡하다”며 “자급률이 법제화된다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가 밀 자급률을 현재 1%에서 2020년 10%로 높이겠다고 하는데 현재 농가들이 밀을 생산해도 판매가 안되고 있다”며 “정부가 자급률 목표를 세웠으면 종자 연구·개발, 밀제품 품질, 가격문제 등 단계별로 해결하려 해야지 밀 소비를 늘려달라고 국민만 바라보는 것은 안된다”고 말했다.박재영 팀장도 “곡물 자급률 확보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방안이 없다”며 “밀이 쌀보다 손이 많이 들어가고 생산비도 많이 들어서 고령화된 농촌 상황에서 밀 자급률을 높이는 게 쉽지 않은데 이에 대한 정부의 전망과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곡물 소비가 많은 국내 축산 시스템을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정환 이사장은 “지역에서 경종농업(벼·밀·보리 농사)과 함께 소규모로 지역순환축산이 이뤄져야 환경적으로도 건강해지고 사료 자급이 가능해지는 등 축산업 자체가 안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윤병삼 교수도 “육류에 대한 국내 수요를 줄이는 방안도 고민해봐야 한다”며 “곡물사료를 덜 먹는 가축으로 국내 축산 시스템을 전환시킬 필요성도 있다”고 말했다.
쌀·보리쌀·콩·사료용 작물과 같은 각종 곡물의 국내 소비량 중 국내 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 곡물 자주율
곡물의 소비량 중 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율이라는 점에서 자급률과 유사하다. 다만 곡물 생산량에 국내에서 생산한 곡물은 물론 한국 공·사기업 등이 해외에서 생산·유통한 곡물도 포함시켜 계산한다.
■ 농민단체 = 박재영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팀장, 송원규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연구원
■ 학계 = 양승룡 고려대 교수, 윤병삼 충북대 교수, 윤병선 건국대 교수, 윤석원 중앙대 교수
■ 연구소 = 성명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실장, 이정환 GSnJ인스티튜트 이사장, 황명철 농협경제연구소 축산경제연구실장 (가나다 순)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입력 : 2012-09-03 21:45:44ㅣ수정 : 2012-09-03 22:52:31
[세계 식량위기 오나]“세계인구 9억은 기아, 20억은 영양부족 … 그러나 15억은 과식”
옥스팜 등 국제구호단체들이 “곡물가격 상승으로 가난한 나라를 지원할 곡물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제기구와 선진국들은 즉각 행동에 나서라”고 주문했다. 이들 단체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식량의 감축, 빈국들의 소규모 농업 지원 등의 대안을 제시하면서 “세계 식량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선진국들의 정책 변화가 요구된다”고 입을 모았다.
■ “식량을 연료로 사용하는 ‘미친 짓’ 중단해야”
옥스팜은 ‘8월 보고서’에서 “미국 옥수수 재고의 40%가량이 바이오연료에 사용되고 있는 ‘미친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세계 곳곳에서 가뭄과 홍수, 이상기후를 일으키고 있는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한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며 “기후변화는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빈국들의 식량 상황을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옥스팜은 소규모 농업 종사자들이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전개할 수 있도록 자체적인 식량 재고를 확보하는 동시에 착한 투자를 촉진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7월 보고서’에서 “식량위기로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 사헬 지역에서 100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영양실조 상태”라며 “국가 차원에서 2세 이하 어린이와 임신한 여성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면서 “해당 국가들과 국제기구 및 구호단체들이 식량위기를 막기 위해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 “상시적 감시체계 구축 시급”
국제식량정책연구기구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선진국들이 잠재적인 식량위기를 막기 위해 실시해야 할 정책 6가지를 제시했다. 보고서는 식량위기가 닥쳤을 때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상시적으로 감시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보고서는 특히 ‘옥수수로부터 바이오연료 채취 중단’ ‘수출금지 조치의 금지’ ‘위기 시 비축 곡물 방출시스템 확보’ ‘빈국 식량지원 기구의 시장 접근성 확대’ 등의 방안도 제시했다. 국제식량정책연구기구는 빈국에 대한 농업 투자액을 늘리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도록 현대적인 기술과 위기 관리체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제물관리연구소는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과 남아시아 빈국의 농업 종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소형 물 펌프를 제공함과 동시에 농업 기술들을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와 같은 비용이 많이 들고 대규모로 진행되는 관개시설 조성보다 오히려 이 같은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국제물관리연구소장인 콜린 차터 박사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발전된 농업 기술들은 사하라 이남 국가와 남아시아 국가 농업 종사자들의 수입을 3배가량 늘리고, 수백억달러의 가계 수입을 추가적으로 거둘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 “식량 낭비부터 줄여라”
지난달 26~3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2012 세계 물주간 학술대회’에 참석한 세계 각국의 수자원 및 식량정책 관련 당국자, 전문가들은 “가장 손쉬운 대안은 식량 낭비를 줄이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식량 자원을 증산하는 것만으로는 물 부족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세계 인구 9억여명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고, 20억여명은 영양 부족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며 “그런데 15억명은 과식을 하고,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식품의 3분의 1은 아무 쓸모없이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톡홀름국제물연구소는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물의 4분의 1 이상이 버려지는 식품 10억t을 생산하는 데 쓰이고 있다”며 “낭비되는 식품을 생산하고, 선적하고, 포장하는 과정에서 낭비되는 비용도 수십억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 G20, 9월 말~10월 초 긴급포럼
세계 주요 20개국(G20)은 이달 중으로 예정된 미국의 곡물보고서가 발표되면, 식량가격 문제에 개입할지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식량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긴급포럼 정식회의는 9월 말 또는 10월 초쯤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G20은 최근 세계 곡물가격 상승과 관련한 긴급 전화회의에서 “즉각적인 위협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세계은행은 식량위기국에 대한 농업 지원프로그램 증액을 준비한다고 밝혔다. 세계은행은 각국 정부에 식량가격 상승에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할 것을 권고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도 국제 곡물가 급등에 관해 논의하고 곡물수출 통제 등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시리즈 끝><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입력 : 2012-09-03 21:45:39ㅣ수정 : 2012-09-03 22:52:34
'기획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일 군사 교류도 잇따라 중단 (0) | 2012.09.03 |
---|---|
[세계는 지금 특허전쟁 중](상) 삼성이 애플을 넘어서려면 ‘경쟁 제품 따라가기’ 안된다 (0) | 2012.09.03 |
[김호기·김상조의 대논쟁-시대정신](3) 복지논쟁 안종범 새누리당 의원 (0) | 2012.08.27 |
경영학자 400여명 위기극복 결의문 "지나친 경제민주화 자제를 (0) | 2012.08.23 |
첫 올림픽 개선행진에 드러난 ‘일본 집단주의’ (0) | 2012.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