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자영업자, 벼랑에 서다]번번이 취업 낙방, 학력 무관 비정규직 석 달 끝에 호프집 열어

ngo2002 2012. 7. 20. 09:46

[자영업자, 벼랑에 서다]번번이 취업 낙방, 학력 무관 비정규직 석 달 끝에 호프집 열어

ㆍ(3) 그래도 자영업으로 간다. 왜
ㆍ28세 김철균씨의 경우

김철균씨(28)는 요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어록을 자주 본다. 작은 호프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지만 경영마인드를 쌓기 위해서다.

그는 현재 충북 제천 대학가에서 호프집 ‘쓰리고’를 운영한다. 쓰리고는 ‘튀기고(치킨, 튀김) 볶고(제육볶음, 낙삼불고기) 지지고(오코노미야키, 파전)’의 약자다. 화투놀이 고스톱의 ‘쓰리고’란 뜻도 있다고 했다. 실제 가게 벽에는 화투패가 그려져 있다. 코믹하고 재미있는 설정 때문인지 손님은 많다. 개점한 지 2년이 되면서 주변에서 이제는 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평가도 듣는다.

2년 전만 해도 그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4년 동안 등록금을 내준 부모를 볼 면목도 없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만 해도 상대적으로 느긋했다고 한다. 생활체육을 전공하고 총학생회장도 지냈던 터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충북 제천시 세명대학교 후문 앞에서 호프집 ‘쓰리고’를 운영하는 김철균씨가 포장용 상자를 만들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 체육 전공에 총학생회장
지푸라기 잡듯 장사 시작
전국 맛집 돌며 안주 개발


시련은 첫 면접 때부터 시작됐다. 체육학과 출신 1명을 뽑는 원주의 한 호텔에 지원해 최종면접에 올랐다. “최종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저와 같이 면접을 본 사람이 조용히 절 불러 얘기하더군요. 사실 이 면접은 ‘쇼’라고. 자신과 같이 온 동료가 취업하기로 내정돼 있고 자기는 들러리로 왔으니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요. 며칠 뒤 나온 결과를 보니 그의 말대로더군요.”

김씨는 호텔, 스포츠용품제조업체, 컨트리클럽 직원모집에 연거푸 낙방했다. 낙심한 그를 지도교수가 불렀다. 교수는 골프용품 제조업체인 ㄱ사를 소개해주며 “사장이 친한 친구니까 면접만 보면 된다”고 말했다. 잔뜩 기대하고 서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하지만 대기실에는 서울의 ㄴ대학, 스포츠로 유명한 ㄷ대학 출신들이 이력서를 들고 앉아 있었다. “저희 교수님뿐 아니라 각 학교 교수님들이 친분 있는 ㄱ사 사장에게 학생들의 취업을 부탁했더라고요. 결국 유명대학 출신 몇 명만 입사를 했죠.”

‘학력무관’이라고 명시한 구인광고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수십 곳이 이력서만 받고 연락이 없었다. 한 조경업체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총학생회장 출신임을 눈여겨본 조경업체는 김씨를 채용했다. 대기업 건설사 아파트의 조경을 담당하는 업체였다. 용역업체 사람을 관리하는 업무로, 하루 일당 6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이었다. 적성에 맞지는 않았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일은 힘들고 돈은 적게 벌었지만 배워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다.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근무는 기본이었다. 새벽 2~3시에 퇴근하는 날도 잦았다.

직장생활을 끝마치게 한 건 입사 3개월째에 발생한 작업자들의 안전사고였다. 벽돌을 쌓는 작업자가 안전모를 벗고 있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돌에 머리를 다쳤다. 용역관리담당인 그는 결국 사표를 썼다.

방황하던 그에게 친구들이 고향인 제천에서 장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마침 단골이던 호프집 주인이 일이 힘들어 문을 닫는다고 하더군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젊을 때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가게 생각이냐’며 마뜩잖아 했다. 상가 유동인구, 입지, 매출 등을 조사해 보고서 13장을 만들어 아버지를 설득했다.

2010년 말, 김씨는 고향인 충북 제천에 호프집을 차렸다. 유명 맛집을 돌아다니며 안주 개발도 시작했다. 대구에서 낙삼볶음(낙지·삼겹살 볶음), 서울 홍대 앞에서 치킨, 제천 순대골목에서 약초순대를 배웠다. 몰래 음식을 싸와서 어머니와 함께 조리법을 연구했다. 일본 유행이 빨리 들어온다는 부산 선술집을 찾아가 손님인 척 음식과 가게 인테리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 호프집이 안정궤도에 오르자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그는 6개월 된 딸아이의 아빠다.

김씨는 “아내가 아이와 함께 산책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쉽지 않다”며 “젊을 때 희희낙락하는 것보다 지금 열심히 벌어 나이 들어 여유 있게 살자고 아내에게 말하지만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못해주는 일이 많아 미안하다”고 했다.

저녁 8시, ‘쓰리고’에 한 팀이 들어왔다. 치킨 박스로 너저분한 오른쪽 홀 대신 깔끔하게 정돈된 왼쪽 홀의 불을 켰다. 김씨가 주방에 들어갔다. 치즈불닭. 이날의 첫 주문이다. 그의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특별취재팀 홍재원·김보미(산업부), 이재덕(경제부), 이혜인(사회부) 기자


<홍재원·김보미·이재덕·이혜인 기자>


 

입력 : 2012-07-19 21:25:33수정 : 2012-07-19 21:25:33

 

 

[자영업자, 벼랑에 서다]50대 이상 자영업자 올 들어 17만5000명 증가

직장을 은퇴한 뒤 창업을 하는 50~60대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 막 뛰어들기 시작한 20대의 창업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19일 발표한 ‘가계 부채 동향 및 서민금융지원 강화방안’ 자료를 보면 올해 1~5월 사이 50대 이상 자영업자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7만5000명 증가했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로 불리는 50대뿐만 아니라 근로전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60대 이상 연령층에서도 자영업자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60세 이상 자영업자수는 8만명 증가했다.

50~60대에 비해 취업이 쉬운 20대에서도 자영업 증가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같은 기간 29세 이하 청년층의 자영업자 비율은 8.4%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청년층 임금근로자 비율은 0.1% 감소했다.

특히 고학력 청년층이 창업을 많이 선택했다. 대졸 이상 학력자의 자영업 비중은 2011년 3.9%에서 2012년에 5.6%로 증가했다.

LG경제연구원 고가영 연구원은 “대학과 대학원 졸업 후에도 취업을 하지 못하던 고학력 졸업자들이 취업을 접고 창업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며 “유럽 재정위기가 터지면서 수출 중심의 한국 기업들의 고용이 증가하지 않고 이 때문에 대학 졸업자 등 고학력자들이 차선책으로 자영업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 연구원은 “자영업자들의 지속적인 증가를 막기 위해서는 20대의 경우 일자리를 늘려 취업을 유도하고, 50~60대는 재취업을 위한 교육훈련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특별취재팀 홍재원·김보미(산업부), 이재덕(경제부), 이혜인(사회부) 기자


<홍재원·김보미·이재덕·이혜인 기자>


 

입력 : 2012-07-19 21:21:12수정 : 2012-07-19 21:21:12


[자영업자, 벼랑에 서다]“어차피 몇 년 뒤면 퇴직… 50세 되기 전에 빨리 털자 했지요”

ㆍ퇴직 앞두고 레스토랑 창업한 최정수씨

그의 가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남쪽 출구에서 나와 60-1번 버스를 타고 원미경찰서에서 내려 골목 몇개를 돌았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도토레’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공학박사 최정수씨(48). 자영업 생활 6개월째다. 까닭부터 물었다.

“기업에 더 있어 봐야 5년입니다. 하루 빨리 제2의 직업을 찾는 게 낫겠다 싶었죠.”

그는 잘나가는 전기공학자였다. 1995년 대기업 연구원으로 입사한 뒤 2000년에는 대학으로 이직해 4년간 일했다. 2005년 벤처기업에 참여해 부품 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직장생활은 바빴다. 최씨는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이 20년 가까이 반복됐다”며 “아이들 얼굴 볼 시간도 없었다”고 말했다.

경기 부천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 ‘도토레’를 운영하는 최정수씨가 오징어 먹물 파스타에 들어갈 면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 박사로 대기업·대학 이력
이탈리아서 석 달간 ‘수업’
“산전수전 다 겪고 있죠”


그저 그렇고 그런 엔지니어로 살다 직장생활을 마감하느니 새 일을 준비하자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준비된 아이템은 없었다. 여러 사업을 물망에 올렸다. 즐겨 먹던 음식인 냉면집을 떠올렸지만 ‘좋아하는 걸 사업화하면 망한다’는 속설을 듣고 포기했다. 재미 삼아 하던 양식 요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난해 9월부터 3개월간 이탈리아에 건너가 요리 수업을 받았다. 피자와 파스타, 아이스크림인 젤라토 등 코스별 강좌를 들었다. 부푼 꿈을 안고 귀국했지만 서울 시내는 권리금과 보증금이 비쌌다. 목동의 10평짜리 가게는 권리금만 1억5000만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구한 게 부천의 빈 상가건물 한 귀퉁이였다. 시공사 부도로 분양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상가건물이어서 싸게 얻을 수 있었다. 권리금도 없었다. 새로 개점하는 가게로서는 좋지 않은 입지였지만 도리가 없었다. 개점 비용은 1억5000만원. 20평 규모의 가게는 보증금 5000만원, 월세 320만원에 얻었다. 여기에 집기와 인테리어 비용 1억원이 소요됐다. 모아놓은 돈과 은행 대출이 각각 절반씩이다.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문을 열어야 하는데, 어디에 치즈 주문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수입업체에 일일이 다 전화해 샘플을 달라고 했죠.”

공산품 유통업자를 잡아야 한다는 말은 나중에야 들었다. 원재료인 밀가루와 계란부터 나무젓가락, 식용유, 쌀까지 트럭으로 내려주는 업체가 있었다. 이들과 뒤늦게 거래를 텄다. 재고관리도 엉망이었다. 파프리카 한 상자를 8만원에 사들인 뒤 5개 쓰고 버린 일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싱싱한 재료를 찾아 새벽부터 여기저기 찾아다니곤 한다. 최씨는 “좋은 맛을 내려면 좋은 재료를 써야 하는데 마진이 나오지 않는다”며 “평생 엔지니어만 하다 보니 그런 융통성은 없는 셈”이라고 말했다.

사업전략 또한 빗나갔다. 이탈리아 정통 요리인 피자를 대표 음식으로 밀었지만 파리만 날렸다. 국내 소비자들은 피자를 간식으로 여긴다. 명품 식사로 소문이 나려면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최씨는 최근엔 파스타를 대표 메뉴로 내세우고 있다. 6개월 정도 지난 요즘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인터넷 포털에서 식당 이름을 검색하면 음식을 칭찬하는 글이 제법 보인다. 그러나 아직 수익은 멀다.

연봉 2600만원을 지급하는 부주방장 한 명과 아르바이트생 2~3명을 쓰면 총 인건비가 월 500만원에 달한다. 여기에 월세, 전기요금까지 포함하면 고정비용이 월 1000만원에 달한다. 그나마 단골손님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손익분기점까지 왔다. 이 때문에 최씨가 갖고 가는 월급은 아직 없다.

주5일제는 이제 ‘남의 떡’이다. 월요일 하루 쉬는데 물품 구매·관리까지 직접 챙기다 보면 쉴 틈이 없다. 그나마 명절 때도 쉬지 못하는 다른 자영업자에 비하면 파격적인 휴식에 가깝다. 그는 “부모님이 ‘편하게 먹고 살라고 열심히 가르쳐놨더니 기껏 식당이냐’고 하신다”고 말했다.

최씨는 식당 근처에 새 지하철역이 들어설 계획이란 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유동인구가 늘어나야 수익이 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최씨는 “남들이 안 간 길을 개척해가는 즐거움이 있다”며 “이 가게를 1호점 삼아 2, 3호점, 나아가 일본, 이탈리아 현지에까지 사업을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영업은 동아리나 취미 활동이 아닙니다. 생업 전선이죠. 남의 주머니 속에서 돈을 빼내와 내 음식과 바꿔야 합니다. 저도 안전한 길만 가봤지 험한 꼴은 안 보고 살았잖아요. 산전수전 다 겪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나중에 철학관 하나 차려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

■ 특별취재팀 홍재원·김보미(산업부), 이재덕(경제부), 이혜인(사회부) 기자


<특별취재팀 홍재원·김보미·이재덕·이혜인 기자>


 

입력 : 2012-07-19 21:25:28수정 : 2012-07-19 21:25:28

 

 

 

[자영업자, 벼랑에 서다]쌍용차 해고된 뒤 막노동 전전…“어쩔 수 없이 치킨집이라도”

ㆍ복직 기다리던 40대 신경원씨의 경우

신경원씨(40·가명)는 쌍용자동차 ‘렉스턴’ 제조라인에서 일했다. 완성차의 결함유무를 테스트하는 품질관리(QC)기사였다. 평택시 칠괴동의 쌍용차 공장을 지날 때면 아들은 운전하는 신씨의 옷을 당기며 말하곤 했다. “아빠, 저거 아빠회사 맞지?” 14년의 땀이 밴 곳이다. 신씨는 “아빠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내 작은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2009년 4월 쌍용차가 2600여명의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하자 신씨와 동료들은 평택공장을 점거하며 77일간의 옥쇄파업을 시작했다. 옥쇄파업을 저지하려는 용역깡패들을 몸으로 막았다. 경찰헬기에 매달린 컨테이너박스에서 경찰특공대가 공장 옥상에 내렸을 때 그도 옥상에 있었다. 신씨는 “방망이와 방패로 맞고 있는 동료들을 보자마자 정신없이 도망갔다”고 말했다. 결국 노사는 마지막까지 반발한 정리해고 대상자 974명 중 52%는 희망퇴직 및 분사, 48%는 무급휴직하기로 합의했다. 무급휴직자 중 일부는 1년 후 바로 복직하고, 생산물량을 확보하는 즉시 무급휴직자부터 복직을 실시하기로 했다. 신씨는 무급휴직자,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동생은 희망퇴직자가 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지만 쌍용차에 복직된 이는 아무도 없다.

신씨는 복직을 기다리며 일자리를 찾았다. 평택시내 제조업체 십여군데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한 전자부품 업체는 채용인원이 10명이었지만 지원자 5명 중 유일한 쌍용차 출신인 신씨만 채용에서 탈락됐다.

경기 평택시에서 치킨가게를 운영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신경원씨가 주방 냉장고에서 튀김용 닭을 꺼내고 있다. | 김기남 기자


▲ “쓰겠다”는 회사 하나 없어
14년 익힌 기술도 힘 못써
“다시 회사 돌아가고 싶어”


신씨는 “중소기업에 취직하려고 해도 쌍용차 출신이라면 아예 배제한다. 정규직은 고사하고 비정규직 일자리도 어렵다”고 말했다.

동생도 중소제조업체 50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다. 연락온 곳은 한두군데뿐이었다. 그마저도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력서에 적힌 ‘쌍용자동차 근무’라는 한 줄 때문이었다. 신씨는 “이제 동생은 이력서에 쌍용차 경력을 지우고 ‘자영업’이라고 적는다”고 말했다. 그는 “쌍용차 출신들이 들어가면 노동조합을 설립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라며 “열심히 일하다가 당한 해고다. 해고가 억울해 공장에 끝까지 남으려고 버틴 것뿐인데 다른 회사에선 우리를 전문 시위꾼처럼 여긴다”고 말했다. 14년간 익혀온 기술은 소용이 없었다. 쌍용차 경력을 숨겨도 나이가 많아 그를 쓰겠다는 회사가 없었다.

일을 하려면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신씨는 장의사인 지인의 가게에서 일하며 시신을 매장하거나 이장하는 일을 했다. 타일제조공장에 들어가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기관지가 좋지 않다. 공장에 날리는 석회가루 때문에 기침은 끊이지 않았다. 같은 렉스턴 라인에서 일하던 ‘살아남은’ 친구가 도시락 만드는 캐터링 업체를 소개시켜줘 5개월간 도시락 배달을 했다.

이후 신씨는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지난해 여름엔 신축빌라 건설현장에서 쓰러졌다. 빌라마다 1층부터 4층까지 오르내리며 하루에 문 50개씩 달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요령없이 힘으로만 하려다보니 탈진했다”고 말했다. 시쳇말로 ‘노가다’ 생활 1년에 허리도 다쳤다. 그는 “22번째로 죽은 그 청년도 해고된 후 나처럼 직장을 구하지 못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며 “쌍용차 사태 후 죽은 이들만 22명이다. 드러난 게 22명이지 해고자 모두가 죽고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막노동으로 번 돈은 일정치 않았다. 술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미용 기술이 있던 아내는 동네 미용실이 바쁜 날마다 나가서 일당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는 “동네에는 마누라가 집안을 먹여살린다고 소문이 났다. 남자가 변변한 직장이 없다보니 내 삶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마음의 여유를 잃자 애들에게 손을 대는 일도 여러번 생겼다.

신씨는 취업을 포기했다. 스스로 가게를 차려 먹고사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해고당한 지 2년 뒤 갖고있던 돈과 은행 대출을 받아 조그만 치킨집을 차렸다. 그나마 기술없이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현재 아내와 함께 낮 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쉴 새 없이 일한다. 문을 연 지 9개월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신씨는 “해고된 친구들은 대부분 이삿짐센터, 노가다, 대리기사가 많다. 4대보험을 떼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은 10명 중 1, 2명 정도”라며 “나처럼 자영업을 시작한 이들도 얼마못가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제 평택공장을 지나쳐도 두 아이는 더 이상 “아빠회사다”라고 외치지 않는다. 신씨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치킨집하는 게 좋아? 회사 다니는 게 좋아?’라고 물어본다. 두 아이는 ‘치킨을 먹을 수 있으니까 치킨집이 좋다’고 답한다. 신씨는 “꼬마가 아빠가 힘들어하는 걸 아는 것 같다”고 했다.

신씨에게 복직은 여전히 희망이고 꿈이다. 쫓겨나기엔 아직 젊은, 숙련된 기술자다. 복직하면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동산에 가는 게 꿈이다.

■ 특별취재팀 홍재원·김보미(산업부), 이재덕(경제부), 이혜인(사회부) 기자


<특별취재팀 홍재원·김보미·이재덕·이혜인 기자>


 

입력 : 2012-07-19 21:21:22수정 : 2012-07-19 23:17:56